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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유엔군의 총퇴각(3)|평양 철수(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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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2월 4일, 「맥아더」원수가 평양포기를 결정하고 시내에서 군 기관을 철수시켰을 때 중공군은 아직도 백여리 북쪽 거리에 있었다. 중공군대 부대가 12월 3일에 평양북방 50㎞의 요충지인 성천을 점령하고 계속 남하했지만 평양까지 도달하려면 2, 3일은 더 걸려야했다. 이 동안에 군에서 북한 주민들의 피난계획을 도왔다면 난민들의 희생이나 고초를 덜었을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남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중공군은 아직도 50㎞ 북방>
원래 평안·황해도의 수복지역은 미 군정하에 놓였기 때문에 이런 문제는 그들 소관인데도 난민계획에는 별로 손을 쓰지 못했다.
제2차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한국 헌병대는 전회의 증언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군 작전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로 오히려 시민들의 철수를 속임수로 막으려고 했다. 이는 나중에 밝혀질 흥남항에서 비교적 질서정연했던 10만 난민 철수와는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고있다. 그럼 다시 관계증인들의 이야기.
▲선우휘씨(당시 정훈국 평양 분실장=대위·현 작가·조선일보 이사·49)

<12월 3일, 나는 아침부터 술만 퍼 마시고 있었읍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서 안됐지만 평양을 등진다고 생각하니 나로서는 남다른 감상에 젖었어요. 이제 고향인 평북 정주에 계실 부친과 막내 동생을 만날 가망이 없게 된 것과 내가 8·15 해방 전에 평양에서 1년 가까이 산 적이 있다는 회포에서이지요. 오후에 평남지사 대리 김성주씨로부터 와달라는 전갈이 있어 갔더니 시민들의 철수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어요.
나는 6·25초의 서울재판이 돼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고 부서진 대동강 다리를 수리해서 시민들을 강 남쪽까지 만이라도 옮겨 놓자고 했어요. 도청간부들도 모두 동감이었어요. 이렇게 하려면 미군 측의 양해가 필요하기 때문에 8군 민사처장 「먼스키」대령을 찾아갔더니 자기는 시민의 도하까지는 생각지 못하고 있지만 시에서 하는 일에 반대하지는 않겠다는 대답이었어요. 그날로 몇 남은 시청 직원의 주관으로 대동강교의 수리공사를 시작했읍니다.

<철교 수리 공사하다가 후퇴>
그런데 그 이튿날(4일) 아침에 분실로 나갔더니 기막힌 보고가 들어왔어요. 미 8군 민사처도, 도청도, 시청도 모두 후퇴하고 청사는 텅 비어 있다는 겁니다. 나는 도청으로 달려가 봤더니 정말 텅 비어 있어요. 2층 계단에서 미군관계 정보 일을 보는 고정훈씨를 만나 「어떻게 된거냐?」고 물었더니 후퇴했다는 겁니다. 고씨도 5, 6백명의 반공인사들을 후퇴시켜야하는데 큰 일이라고 걱정을 합디다. 나는 그 길로 대동강교로 달려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교량 수리공사는 중단돼 있어요. 12월 4일이면 대동강이 보통 얼만도 한데 이해따라 살얼음도 없이 푸른 물결만 유유히 흐르고 있어요. 수만 피란민들이 넋을 잃고 멍하니 바라다보고만 있구요. 날쌘 젊은이들이 부서져 버린 철교의 「아치」를 원숭이처럼 간신히 타고 기어가다가 발을 헛디뎌 떨어지는 참경도 보여요.
정말 미칠 것만 같은 심경입디다. 대동강교를 수리한다고 해서 「평양 시민에게 고함」이라는 표제 하에 「곧 대동강교의 수리가 끝나니 시민은 마음놓고 있다가 그리로 후퇴하십시오」라는 뜻의 포고문을 수백장 써서 붙인 것이 바로 어제 일인데 결과적으로 새빨간 거짓말을 한 셈이 된 거예요. 나를 바라다보는 피란민들의 말없는 눈길이 마치 화살촉처럼 느껴졌읍니다.
가슴을 죄며 이 궁리 저 궁리 끝에 번개같이 한 생각이 떠올랐어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피란민과 함께 다리를 놓자는 생각이죠. 철교 중간 30m정도가 끊어졌는데 거기만 수리하면 되겠다 싶더군요. 다리 옆에는 수리하다 놓고 간 재목과 새끼줄도 꽤 많아요.
나는 조금 높직한 재목더미 위에 뛰어가 권총을 빼들고 공중에 한방 쏘았읍니다.

<4시간 안에 징검다리 완성>
자연히 피란민 눈길이 나에게 쏠릴 밖예요. 「여러분」하고 나는 말문을 열었습니다. 「나는 국군 장교입니다. 장교 체면상 거짓말을 안하니 조용히 들으십시오. 이렇게 자기만 살려고 다투다가는 모두 죽소. 이럴수록 침착해야합니다. 저 밑에 다리를 놓을 수 있습니다. 힘을 합해 다리를 놓고 그리로 건너갑시다. 중공군은 아직 순천 북쪽에 있소. 내가 끝까지 여러분과 함께 행동 할테니 나를 믿어주십시오. 어떻습니까?」 그러자 피란민들 속에서 「옳소」소리와 함께 요란한 박수소리가 터져 나옵디다. 이 「옳소」와 박수는 북한주민들이 오랜 적 치하에서 의무적으로 익혀온 것이지만 이때 것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고 믿습니다. 나는 부녀자를 뺀 피란민들을 4열 종대로 정렬시킨 뒤 그 가운데서 토목공사의 감독 경험자를 뽑고 2백여명을 두 패로 나누었어요. 그리고는 감독 한명에 백명씩 달아주어 한패는 물 속에서, 다른 한패는 다리 위에서 공사를 하도록 했어요. 이렇게 해서 수리공사가 재개됐는데 살려고 하는 사람의 힘은 놀라웁디다.
불과 4시간도 못돼 30m나 되는 물위에 사람이 건널 수 있는 징검다리가 완성됐어요. 마지막 판자가 걸리고 그것에 새끼로 동여지는 순간 다리 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수천 피란민들은 일제히 만세를 외쳤어요.
나는 벅찬 감격으로 만세조차 부르지 못하고 뜨거운 눈물만 흘렸어요.
곧 피란민들은 줄지어 질서 정연히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간혹 새치기하려는 사람도 있었지만 모두가 이젠 살았다는 생각에서 화기애애하게 건넜어요. 이날 오후 2시가 되자 수리한 철교로 건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뗏목으로 선교리 쪽으로 건너는 인파가 대동강을 덮었어요. 나는 이 막판에 줄곧 함께 행동한 이용상 대위와 이 광경을 바라다보며 깊은 감상에 사로 잡혔읍니다.
강 위에는 무수한 목화송이가 뜬 느낌이었어요. 기슭에 모여있는 군중이나 뗏목 위의 사람들은 겨울인데도 대개 흰옷이예요. 백의민족이란 말은 우연히 생긴 게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겠더군요. 어느 뗏목 위에서는 서도의 수심가도 들려와요. 대동강 물결을 스치며 퍼져가는 노랫가락이 어쩌면 그렇게도 구슬픈지….
나는 다시 분실로 돌아와 마지막 차를 떠나 보냈습니다. 분실 식당에서 일하던 두 소녀가 함께 데려다 달라고 해서 그녀에게 겨울 솜 군복을 입혀 「트럭」 한구석에 태워주었어요. 2주일 전부터 분실에 와있던 선우연 소위가 그 「트럭」을 지휘하게 됐는데 가지 않고 한사코 남겠다는 거예요. 그는 내 친동생인데 형을 혼자 두고 못 가겠다는 거지요. 나는 속으로 역시 핏줄은 다르구나 하고 기특하게 생각했지만 더 지체할 수도 없어 버럭 소리를 질렀어요.
「지금 형 생각하게 됐니? 못 가겠다고? 이게 장난인줄아? 소위 차렷, 명령이다. 출발!」 그래도 아우는 미적거리다가 겨우 떠나버립디다. 그렇게 되니까 좀 허전하면서도 마음은 홀가분하데요. 우리 3형제 중 막내는 고향 정주에 있지만 가운데는 대동강을 넘어갔으니 이제 나는 죽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텅 빈 분실을 한바퀴 휘둘러보다가 책상 뒤에 놓아두었던 꿀단지를 발견했어요. 누가 주워서 반쯤 먹다 남은 건데 처치 곤란하게 됐어요. 좀 장난칠 생각이 나서 종이 한 장을 책상 위에 펴놓고 거기에다 「이 꿀에는 독이 안 들어있으니 누구든지 마음놓고 먹어라. 안 먹으면 겁장이다」라고 쓰고 그 위에 꿀단지를 올려놓고 분실을 나와 버렸어요. 아마 어느 놈도 그 꿀을 못 먹었을 거예요.>

<정훈국 분실이 제일 애써>
▲고정훈씨(당시 미 육군성 한국 파견대소속 대원=중령·현 사업·51) <나는 평양후퇴 명령을 받고 우선 북한에 있는 각계 인사들을 데리고 나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심리전과 첩보활동을 주로 했던 미 육군성 한국 특별파견대의 한국인 책임자였던 나는 북진하면서 자연히 대민 접촉이 많았어요. 평양에서는 공산치하에서 지하활동을 하던 기독교 자유당원들과 선무공작으로 포섭한 인사들로 북한 자유당을 조직했어요. 평양일보를 발행하는데도 각계의 저명인사들을 동원 했구요. 후퇴가 결정되자 우리에게 협력한 이 분들을 그냥 두고 올 수 없다고 다시 적 치하에 있게 되면 꼼짝없이 죽게 되니까요.
그래서 자유로이 남하할 수 있는 통행증을 떼어주고 가능한 한 차편도 마련해 주었어요. 이때 내가 내준 증명서가 1천 2백장쯤 됩니다. 정훈국 평양분실 직원들이 피란민 철수에는 제일 애를 썼어요. 이때 내 도움으로 무사히 남하한 분으로는 김백봉 여사 일가(현 경희대 교수) 주창균씨(현 일신산업 사장)등이 기억나는군요. 나는 마지막까지 평양에 남아 저명인사와 북한 자유당원들의 피란을 돌보았어요.

<중공군 들어와도 환영 안해>
내 딴엔 최선을 다하려고 했지만 워낙 혼란의 와중이어서 시민 철수가 제대로 잘 안된 것도 사실이지요. 이 무렵에 내가 소속된 기관에서 얻은 중공군에 관한 정보의 하나는 그들이 남하하면서 북괴군 지휘관을 몹시 나무랐다는 거예요. 중공군이 들어와도 도시·농촌 할 것없이 환영하는 주민이 전혀 없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북괴군이 얼마나 실 인심을 했으면 이 꼴이냐고 야단이었대요. 그리고 내 생각으로는 이때의 「유엔」군 후퇴는 순전히 작전상의 전략적인 퇴각 같았어요. 일사천리식인 후퇴였으니까요.
아마 「맥아더」원수 자신은 가능한 한 병력과 장비의 손실 없이 후퇴를 해서 제주와 일본 북구주에서 전력을 재정비, 원산 같은 데 상륙작전을 전개하려 했던 모양이예요. 물론 「워싱턴」은 반대였지만요. 「맥아더」는 중공군의 2차 공세 후부터는 이제는 북평 정권과의 대 전쟁임을 인식했어요. 그러니까 통로가 좁고 독 안 같은 한반도에 많은 중공군을 끌어 들여다 놓고 원산 선으로 상륙해서 남만주로 진격할 구상을 세운 것 같아요. 그래서 12월의 「유엔」군 후퇴속도가 그렇게 빨랐을 겁니다.>
◆주요일지(1951년 1월 14, 15, 16일) ※1월 14일 ▲적, 30만 병력으로 공세재개 ▲적기, 처음으로 「유엔」군 진지에 소이탄 투하 ▲부산·대구의 피란민 지방 분산 결정 ▲「콜린즈」미 육군 참모총장, 동경서 「맥」원수와 요담 ▲외신, 한국 정부는 제주이전을 고려중이라고 보도
※1월 15일 ▲미군, 오산탈환 ▲중공군, 미 공군기의 맹폭으로 수원 포기 ▲국회, 부산극장서 재개 ▲이선근 정훈국장, 해외도피 기도자들의 맹성 촉구 담화
※1월 16일 ▲미군, 수원탈환 ▲「반덴버그」미 공군 참모총장 내한 ▲최순주 재무, 예금지불에 제한 없다고 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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