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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제자는 필자|제17화 양화초기(1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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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서화협회의 개혁>
선전은 1944년까지 23회를 계속했다. 그동안 이에 맞서서 고군분투한 미술단체는 서화협회이다. 서화협회는 한국의 많은 서화가들이 일제아래서 결속하여 회보도 간행하고, 1921년에 첫 협전을 가졌다. 이후 많은 동료들이 일제의 식민지 정책을 좇아 선전에 매달림에도 1939년까지 19회 협전을 거듭하는 등 민족적 강행군의 발자취를 남겼다. 초대회장은 안중식씨. 오세창·최린·이도형·조소림 같은 분도 여기에 모두 들어있었다. 그후 서화협회는 산파역을 한 춘곡 고의동씨에 의해 이끌어왔다.
이런 서화협회에 개혁의 바람이 분 것은 1937년쯤이었던 것 같다. 춘곡은 초기에 서양화를 했지만 이내 동양화로 전향했고, 서양화가로는 시관 장석표씨가 유일한 회원이었을 따름이다. 시관은 협회를 주도하는 중견 서화가들에 비하면 훨씬 나이가 젊었고, 따라서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었다.
그러나 시대는 그렇지 못했다. 동양화가들만으로는 협회의 침체를 벗어날 수 없으며 사회로부터 이목을 모으는데도 부족했다.
한국인의 독보적인 이 미술단체가 발전하려면 서양화가를 포섭하지 않고는 안되었던 것이다. 협전이 설혹 총독부주최의 선전에 대등할 수는 없다하더라도 암암리에 대항하는 자세를 갖추려면 규모부터 확대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서양화가는 당시 미술평을 쓰고 미술보급운동에 앞장을 서며, 그만큼 사회에 대한 영향력이 크고 발언도 강했다. 신문에 오르내리는 것은 거의 서양화가였다. 소설삽화까지 으례 양화가의 차지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협회의 발전을 위하여 서양화가의 가담은 필연적인 요청이었다. 협회 자체로 보면 춘곡의 독주를 억제하려는 이유도 있었겠으나 대국적으로 보면 그건 하찮은 문제에 불과하다.
그래서 재 규합된 회원이 춘곡을 비롯하여 동양화가가 이용우 이상범 노수현 김은호 변관식씨 등 30명 정도이고 서양화가로는 장석표 이종우 이병규 윤희순 김종태 이승만 강신호 구본웅 김중현씨 등 10여명. 이들은 그해부터 협회 전에 출품했다.
돌이켜보면 선전에 대한 이런 대항의 움직임은 그보다 10년전에도 있었다. 그때 시대일보에 있던 벽초는 무림에 뜻이 있는 사람이라서 가까이 드나드는 김복진씨에게 선전에 대항하기 위한 야전형식의 그룹전을 권유한바 있었다. 김씨는 곧장 행인 이승만씨를 찾아가 상의했는데, 그러나 행인은 섣불리 대항전을 여느니보다는 일인에 대항할 만한 실력의 양성이 시급 한다는 주장이었다. 벽초 역시 이 의견에 찬동이었고, 젊은이들의 동경유학을 뒷받침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래서 행인·안석영·김복진 세 사람이 우선 직장을 버리고 동경으로 건너간 일이 있다. 그들은 물론 경제적 사정이 여의치 않아 1년 가량 있다가 모두 귀국하고 말았지만.
그 소망이 이루어진 것은 10년 뒤이지만, 체질이 개선된 서화협회가 시기적으로 순탄하지 못했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제는 한국인의 거취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개혁의 저의는 어째든 간에 이 단체의 움직임이 활발해지자 총독부는 은근히 압력을 가했다. 그 시절만 해도 회원들이 매일 만나서 오후엔 으례 술 마시곤 했는데, 춘곡이 몇몇 사람과 의논하여 협전을 유야무야로 집어치울 심산이었다. 그 기미를 안 개혁파의 소장 양화가들은 춘곡에게 대들었다. 『그냥 흐지부지할게 아니라 정정당당하게 거취를 취하고 그만 두더라도 이유를 밝혀두자.』 그래서 열린 것이 1939년의 마지막 협전이요, 전시회가 끝나는 날엔 함께 모여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협전은 서양화가가 끼어 들고 3회. 전보다 훨씬 활기를 띤 셈이지만 그 반면에 수명을 단축시켰는지 모른다.
그때의 서화협회를 돌이켜 다시 생각되는 사람은 상무간사이던 장석표씨이다. 그는 춘곡의 심봉자로서 초기 협전을 장식한 양화가이다. 그림은 그리 신통한 것이 못되었으나 더러 빛나는 것이 있었다. 그는 춘곡의 팟쇼에 반발하여 협회를 바로잡는데 큰 역할을 했다.
나중에는 그 역시 동양화로 전향했고 전쟁 말기에는 메리야스 공장을 차리더니 화단과 멀어져버렸다. 수년전 세상을 떠난 걸로 알고 있다. 심영섭이라는 당진 태생의 양화가도 있었는데, 그는 아주 니힐리스트였고 도덕경이나 불교에도 탐닉했었다.
그리고 이상과 늘 맞붙어 다니던 곱사등이 멋쟁이 구본웅씨도 기억에 남는 사람이다. 그는 그림이 괜찮았는데 김복진씨와 가까이 사귀면서부터 조각을 했으며 이상이 간지 얼마 있다가 뒤 따라 가듯 세상을 떠났다. <끝> 【이종우】
※다음은 박헌봉씨의 명창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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