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뒷전으로 내 쫓긴 '대구시대책본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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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부터 사고 수습의 책임과 권한을 대구시가 아닌 중앙지원단이 갖게 된다고 봐도 되느냐.”

지난 3일 대구지하철 중앙로역에서 실종자 가족은 대구시 사고대책본부를 상대로 이참에 결말을 짓겠다는 듯 다그쳤다.이에 대구시 고위간부가 “그렇다”고 답변하자 그때부터 대구시 대책본부는 사고처리의 뒷전으로 내몰렸다.

TV에서 이 장면을 봤다는 택시기사 장모(44)씨는 “대구 사람이라는 한 가닥의 자존심마저 내주는 듯 참담했다”고 말했다.

평소 ‘지방정부’를 자임했던 대구시가 정작 큰 일을 당해서는 제 역할을 떠넘겨야 하는 처지로 몰린데 대해 시민들은 ‘자업자득’(自業自得)으로 평가하고 있다.

자업(自業)의 가장 큰 부분은 초기부터 피해자 및 시민들로부터 “대화 상대가 안된다”는 정도의 불신을 자초한 점이다.

불신의 뿌리는 대구시 대책본부의 안일한 대응이었다.

한 실종자 가족은 “대구시가 이번 참사를 피해 규모가 큰 교통사고 정도로 여기는 느낌이었다”며 분개했다.

사태 인식이 이렇다 보니 대책본부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고 처리보다는 울부짖는 가족들과 대치하는 모양새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다.

실종자유가족대책위의 한 관계자는 “특히 대구시 간부들은 민선시장 뒤에 숨어 화살만 피하려는 자세였다”고 질타했다.

한 간부는 술에 취해 실종자 가족들과 “네 죽고 나 죽자”식의 승강이를 벌이는 정반대의 적극성을 보이는 해프닝도 빚었다.

그 경황 중에도 사고책임을 숨기려 하거나 사고현장을 월드컵 거리응원장 청소하듯 서둘러 치워버린 행위 등도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사고 직후 정부에서 특별재난지구 선포 얘기가 나오자 “곧 U대회를 치를 대구의 이미지를 해칠 수 있다”고 했다는 시 고위간부의 반응이 사태 인식수준을 단적으로 말해 준다.

한 시민은 “시 공무원들이 풀려도 너무 풀렸다”며 “대형사고를 뒷감당하지 못하는 지방정부라면 그들이 외치는 지방분권도 공염불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정기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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