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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산상의 기구천년…영암 마애석불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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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통일신라시대의 정교하고 당당한 암벽의 거불 조각품이 전남 영암 월출산 마루의 능선에서 발견됐다.
문화재 관리국은 여러 해 동안 이 지역에 조사반을 파견해 오던 중 지난봄까지 실패를 거듭했으나, 이번 한 목격자를 찾아냄으로써 발길이 냉큼 미치지 못하는 암 봉 사이에서 경주석굴암 대불의 2배가되는, 높이 7m의 거대한 마애불상을 확인하는데 성공했다.

<국보급의 백제 유민 솜씨>
조사 자 맹인재 문화재 전문위원은 백제 유민들의 슬기가 예대로 풍기는 이 마애불이 우리 나라에서 유례없을 이만큼 압도되는 독보적 수법의 9세기쯤의 미술품이라고 주장, 이를 국보로 지경 신청하겠다고 밝혔다. 마애불로서 보물로 지정된 것은 몇 점 있으나, 국보는 백제불교초기의 서산 마애삼존불상(국보 48호)뿐이다.
영암시내에서 서남 약 8km. 바위 덩어리의 월출산 구정 봉 가까운 서북 능선의 해발 6백여m를 헤아리는 산장이다. 마애불은 서해를 굽어 앉아 있으며, 바로 밑에 없어진지 수백 년이 지났을 절터의 초석들만 수풀 속에 묻혀 있다.
이 거대한 불상은 양각의 깊이 70cm나 되게 돋을 새김 하여 거의 원 불상과 같은 걸작품. 맹 위원의 중국의 대동석굴의 대불에서 느끼는 그런 양감을 받는다고 비유한다. 마애불 하면 흔히 10cm 남짓하게「릴리프」한 것이 아니면 선만으로 음각 해 표현한 것이 통례이다.
그러나 이것은 형식상 조각을 바위에 붙여 그대로 새겼을 뿐, 불상 후면을 받치는 광 배까지 완연히 드러나 보여 각 공의 충만한 의욕이 넘치고 있다. 광 배는 몸과 머리를 각각 두른 2중 원광. 한 가운데에 연화를 두고 실상당초 무늬로 주연을 둘렀으며 그 외곽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꽃 무늬가 암벽 갓 갓으로 미치고 있다. 이 주불 왼쪽에는 7m의 본존불에 비해 너무도 앙증스럽게 작은 협시보살이 서 있다. 입상의 높이 87cm. 정병을 안고 선 모습이 지병 관 음이다.

<서해 향해 해로안전 빈 듯>
주불은 서방 정토를 상징하는 아미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왼손을 무릎 위에 앉히고 바른손 끝으로 땅을 누른 강마해지인이다. 이 시대에는 아미타 사상이 팽창해 있었다. 나라를 수호하고 백성이 화평하게 살도록 염원하는 뜻에서 이곳에 정성을 모은 것이리라. 아니 월출산은 한반도 서남 단이 영산. 예부 터 전해오는 말로는 이 산 속에 99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월출산 남쪽 멧부리에는 도 갑사·무 이사 같은 고찰이 남아있는 것이다. 하지만 해안일대를 조망하는 산상에 대불을 봉안한 까닭은 무엇일까. 당시 이 고장이 중국·인도 및 남방 섬나라로 가는 해로의 시발점이라는 점에서 해석함이 좋을지 모른다. 엄청난 기구의 표적이기 때문이다.
너무도 높고 험한 산꼭대기에 아로새긴 불상이다. 영암서 회 문리까지는 15분 남짓 택시가 가 닿는다. 그러나 노 암 부락에서 준비가 필요하다. 이 불상을 봤다는 사람은 단 두 사람 밖에 없는 안내자를 찾아 동행해야하는 것이다. 산 마을 사람들이지만 섣불리 이 거한 산 속을 치오를 일이 없다. 그래서 아예 길이 없는 것이다. 해발 8백여m의 월출산인데, 약 4km쯤 계곡을 거슬러 오르긴 그래도 괜찮다. 문제는 마애불이 있는「학성궁」까지의 가시덤불 2km이다. 천봉만봉이 솟은 암산의 돌밭인데다가 인적이 끈인지 오래되어, 잡목덤불에 억새풀이 우거졌고 칡과 머루등 덩굴이 어우러져 덮쳤다. 아무리 서둘러도 1시간에 1천m밖에 전진이 안 됐다.

<우리 예술의 왜소성 부인>
노 암 부락에선 월출산에 남매가 있다고 구전돼 온다. 그중「학성궁」이라 일컫는 대불이 오빠가 되고 도 갑사 뒤 산마루에 있는 것이 누이동생. 이 오뉘는 아득한 옛날 중국대륙에서 제주도를 뚝 떼어 맞들고 오다가 바다 가운데 떨어뜨린 벌로 그만 굳어져서 영원히 마주 그리워하며 속죄하게 됐다는 전설이다. 그 누이가 되는 마애불은 고려 때 것으로 선각으로 표현한 것 중의 대작이다.
「학성궁」거 불은 한국의 조각품이 외국 것에 비하여 왜소하다는 일반적인 말에 일침을 가할 만큼 웅대한 것이다. 손톱의 길이가 한 뼘이 넘는다. 손가락의 길이는 무려 62cm에 굵기가 직경 15cm, 발바닥이 1m55cm, 어깨에서 팔꿈치까지가 2m요, 얼굴이 또한 육계(부처의 머리 위에 솟은 부분)까지 합치면 그만한 치수이다. 바위를 타고 오를 수가 없어 그 이상의 수치는 계산이 잘 안 된다. 목에는 당시 불상의 특징으로 삼도가 드리워졌고, 오른쪽 어깨에서 흘러내린 의문은 하도 엷게 표현되어 온 몸의 볼륨이 선연하게 배어 났다. 천년의 비바람이 씻겨간 오늘에도 손마디에 주름살까지 생생하고, 보면 볼수록 살아있는 피부 감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이 아미타 좌 불은 옷자락으로 감싼 상현 좌에 사 뿐 올라앉아 서해 수평선을 끝없이 지켜본다. 아무런 기록에도 없는 이 불상이 한반도를 둘러싸고 국제정세가 미묘한 지금에 와서 현신 하듯 새삼 우리 앞에「클로스·업」된 게 어쩐지 심상찮은 생각마저 든다.
【글=이종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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