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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 판단·보고 과정에 이상이었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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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군 특수 범 난동사건을 규명하기 위한 국회 국방·내무위원회 합동조사반은 27일 난동발생지인 인천 앞 바다와 실 미 도에서 인천·부평·소사를 거쳐 서울 대 방 동까지의 침입경로를 현지 답사했다.
이 답사에서 조사단은 군 해안초소의 무전기 고장, 경찰통신의 부정확, 해당 경비부대의 출동지연 등을 지적했으며, 실 미 도에서는 내무반에 남아 있는 핏자국 등으로 보아 난동의 처참함을 확인했다.

<얼룩진 피 대장격투 흔적>
23일 상오 6시30분쯤 특수 범 24명은 이 섬의 유일한 통신수단인 무 선실을 폭파하고 이어 불어 있는 무기고도 부수었다.
이날 첫 행동을 개시한 자는 부대장 거실에 있던 특수 범 1명이었다. 무 선실 옆에 있는 부대장 거실에는 부대장용, 당번용, 가끔 찾아오는 상사용 등 3개의 베드가 있었는데, 이날 밤 당번용 베드에는 평소 부대장의 신임을 얻어온 특수 범 1명이 자리잡고 있었다. 부대장 거실 사방 벽은 핏자국으로 얼룩져 공격을 받은 부대장이 격투했음을 알 수 있었다.
무선실과 무기고를 폭파한 다음 특수 범들은 내무반으로 향했다. 나란히 연결된 침대의 머리 쪽은 시뻘겋게 피가 묻어있었다.
특수 범들은 경비병들을 몰살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특수 범들은 처음에는 고무 보트를 타고 섬으로 가 이장에게 부대장이 맹장염에 걸렸으니 급히 인천으로 가야겠다고 속여 6t자리 배를 얻었다.

<초병에 신분증보여 통과>
실 미 도를 탈출한 특수 범들이 인천 송도 유원지에서 인천 시내 쪽으로 약 2km 떨어진 개펄 앞 해안 초소에 도착한 것이 23일 낮 12시20분, 초소병 김형운 일병(22)이『수하』하자 이들은 신분증을 보이고 욕지거리를 하면서 초소 옆에서 몸을 씻고 조개 고개를 향해 산등성이를 넘었다. 초소병은 25분이 지난 후에야 이들의 통과사실을 중대본부에 보고했다.
1시쯤 초소중대 2소대가 출동했다. 조개고개 중턱에서 시내 버스(경기 영5-2373)를 타고 있는 이들을 70m 거리까지 쫓아간 이원희 소위(23)가 공포 2발을 쏘며 정지 명령을 내리고, 고개 위에 있던 김정두 하사(25)가 뛰어나와 버스 앞을 가로막는 순간 범인들의 일제 사격과 함께 버스는 떠났다.
이 소위는 무선 보고를 하려했으나 긴급출동 하느라고 무전기「안테나」가 고장, 송수신이 불가능했다. 대대본부가 보고 받은 것이 1시15분, 연대본부는 25분, 사단본부는 30분, 이때는 범인들이 부평 쪽으로 달리고 있을 때였다. .

<1시10분 민간인 첫 신고>
경기도경이 이 사건을 처음 안 것은 하오 1시10분, 동 인천 경찰서에 민간인이『조개 고개 위에서 접전이 있었다』고 신고해 온 것이다. 1시25분「사이 카」를 탄 민간인이 또 신고해왔다.
경찰기동 타격대가 출동했으나 특수범인들은 이미 주안고개를 넘은 후였다. 도경은 1시25분 내무장관·치안국장·인근 군사 단에 통보했다. 특별 범이 탄 버스를 뒤쫓다. 피살된 동 인천 경찰서소속 김창원 순경은「사이 카」에 부전시설이 있었으나 연락을 받지 못해 버스의 정체를 몰랐다.

<현지 주둔군 조치 늦어>
경찰은 각 지서에 진급지시를 내렸으나 모두 특수 범들이 지난 후 하달 되었다.
경찰대비책의 실수는 범인들이 경인 고속도로를 통해 서울로 가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었다. 군의 경우도 인천지구의 작전 권이 군에 있는 만큼 현지 주둔군도 이에 대한 긴급조치를 했어야 했다.

<늦은 상부로의 상고체계>
8·23 난동 사건에서 드러난 큰 문제점의 하나는 군과 경찰의 통신체계였다. 긴급을 요하는 통신 연락을 보통 때의 방법대로 중대장·대대장·연대장·사단장식으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렸고 상황은 급진전으로 전개됐다는 것이다. 또 다른 문제점은 작전이 없다하여 방관할 것이 아니라 위급한 상황에 즉각 대처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 조사위원들의 말이었다.

<버스번호 제대로 파악 못해>
특수 범들이 인천에서 유한양행 앞까지 진출하는 동안 사고 버스의 번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점도 조사 위에서 지적됐다. 내무부장관은 국회증언에서 특수 범을 태운 버스가 대방동 로터리까지 왔을 때도 경찰은 버스의 번호를 모르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당시 대방동 파출소 앞 녹지대에 진출, 잠복해 있던 노량진서 기동 타격 대는 특수 범들이 먼저 발포하자 그때서야 버스의 정체를 확인, 유한양행 쪽으로 이미 달리고 있는 버스 뒤를 향해 사격을 가했던 것이다.
국방위 조사위원들은 이날 조사를 통해 당국이 하오 3시10분『무장공비가 출현했다』고 발표한 사실은 특수 범들의 신분을 알고도 거짓 발표한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나타냈다.
버스가 유한양행 앞에서 폭파하고 멎자 제일먼저 버스 안을 검색한 사람은 노량진 경찰서 형사 과장이었다. 그는 이날 하오 2시30분 버스 내부에 들어가 증상자의 몸수색, 수류탄 실탄을 뺏었고 특수 범들의 신분증도 거둬들였다.
또 특수 범들의 복장·마크·카빈 등이 확인됐고 특수 범 난동을 지휘했다는 김종철이 병원에 도착하면서『나는 공비가 아니다』 면서 신분을 말할 수 있었던 점으로 보아 발표시간(3시10분)전에 이들의 신분은 이미 확인돼 있었지 않았느냐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버스 사고는 총에 맞은 것>
노량진 경찰서장 김영도 총경은 난동 자를 태운 버스가 유한양행 앞에서 가로수를 들이받은 것은 대방동 기동타격대가 버스 앞 오른쪽 바퀴를 소아 뚫었기 때문이라고 진술했다.
김 총경은 바퀴 터지는 소리 외에 자폭하는 폭음이 두 번 더 들렸다고 만 했다. 그러나 당시 버스 앞좌석 오른쪽에 타고있던 승객은『한 손에 총을 든 특수 범이 운전해가다가 유한양행 쪽서 총격을 가해오자 머리를 수그리는 바람에「핸들」이 꺾여지면서 가로수를 받았다』고 진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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