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만화와 미술이 소통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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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글오글 고물고물 벌레처럼 구불텅거리는 인간군상이 칸 하나 하나를 메웠다. 춤추고 날뛰는 디스코텍, 노름에 정신이 팔린 밀실, 엄숙하게 둘러앉은 회의장… 천태만상 인간사가 검은 선으로 나뉜 공간마다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화가 주재환(62)씨가 그린 '몬드리안 호텔'은 만화처럼 보이는 그림이다. 모더니즘 미술의 대표작가인 몬드리안의 격자형 회화형식을 빌려다 한국 풍속도를 구겨넣은 호텔로 둔갑시켰다.

칸마다 펼쳐지는 풍경은 만화가 지닌 풍자정신으로 웃음을 자아낸다. 서구미술을 좇는 한국미술에 대한 야유를 바닥에 깐 이 그림에서 미술과 만화는 피가 통했다.

흔히 고급과 저급이란 벽으로 갈라지던 미술과 만화가 그 경계를 허물고 한 몸으로 만나고 있다. 만화적인 기법과 양식을 스스럼없이 가져다 쓰는 젊은 작가들이 많아지면서 그 변화에 주목하는 전시회도 늘어난다.

8일부터 6월 30일까지 서울 대현동 이화여대박물관(관장 윤난지)에서 열리는 '미술 속의 만화, 만화 속의 미술'은 화단의 이런 흐름을 읽는 기획전이다.

주재환.안규철.이동기.최호철씨 등 미술가들과 김산호.임창.이현세.박재동.김수정씨 등 만화가 66명의 작품 84점을 한자리에 모아 대중매체시대에 만화와 미술이 소통하는 여러 모습을 살폈다.

전시는 크게 네 분야로 이뤄졌다. 첫째는 흔히 캐릭터라 일컫는 만화 주인공들의 이미지와 도상을 재해석하는 작업을 묶은 '우리 시대의 도상학'이다. 미키마우스와 아톰을 뒤섞은 '아토마우스'의 작가 이동기, '땡이'로 이름난 임창의 작품 등이 선보인다.

둘째는 만화의 특성으로 꼽히는 그림과 말의 결합 또는 작품의 얼개가 이미 이야기를 품은 '말하는 형상'이다. 만화가 신동헌, 상상 속 생물을 창조해 이야기를 꾸미는 최우람씨 등이 이 부문에 속한다.

셋째는 만화 고유의 형식미라 할 '칸과 칸 사이'다. 이야기를 이어가면서도 그 틈새에서 시간과 공간의 여백 구실을 하는 칸의 미학을 주재환.이두호씨 작품으로 뜯어본다.

이 전시가 내리는 결론이라 할 넷째 주제는 '풍자.상징.기호'다. 가볍고 재미있으며, 억압된 욕망과 금기를 깨뜨리는 만화의 힘을 정운경.박재동.최호철.이희재.주완수씨 만화에서 찾는다. 10편의 애니메이션을 덤으로 볼 수 있다.

전시에 따르는 행사도 풍성하다. 4월 12일 오후 1시부터 박물관 시청각실에서 '현대미술과 만화'를 주제로 한 토론회가 열리고, 박물관앞 뜰에서는 5월 3일 오후 1시부터 '만화가와 함께 만화그리기'와 3~5월 마지막 토요일 오후 1시부터 캐릭터 수공예품을 전시.판매하는 '아티스트 벼룩시장' 행사가 펼쳐진다.

또 전시기간 중에 박물관 3층 휴게실에 만화방이 설치돼 다양한 만화를 볼 수 있다. 02-3277-3152.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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