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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에 남긴 민족의 발자취|고승제 교수 『농업이민에 관한 연구』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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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만주는 오늘날 중공령으로 돼 있지만 한국과의 관계에서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지역이다. 고조선이래 부여·고구려·발해 등 한민족의 옛 영토일 뿐 아니라 일제시대에 한국 이민의 서식처였고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었다는 사실은 쉽게 잊혀질 수 없다. 아직도 많은 한국인이 만주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 한국인들의 이입상황이 어떠했던가는 역시 관심이 아닐 수 없다. 고승제씨(경제과학심의회 위원)는 이점에 관심을 갖고 『만주 농업이민의 사회사적 분석』(백산학보 10호)에서 특히 만주에 대한 한국농민 이민의 과정을 한일합병의 전후, 만주사변의 전후의 4단계로 나누어 분석했다. 이 논문의 요지를 소개한다.
청태조의 발상지라는 이유로 만주의 「동변지」를 성역화해서 거주를 금했던 청조의 국위가 쇠퇴되면서 중국 본토 특히 산동인과 한국인의 입주가 현저해졌다. 통감부 임시 간도 파출소가 1909년에 시행한 이주민 조사에 따르면 산동인의 간도 동부 이주는 1889년, 간도 서부 이민은 1839년이었다.
이에 비해 한국인은 간도 서부 즉 만주지역에 1889년 함북 길주 출신 정명순씨, 부령의 유백윤씨 가가 이주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청조가 적용한 봉금정책에 맞서 이조는 간도와 만주에 대한 이주를 금하는 변방정책을 시행했다. 청조의 정책이 중국인·한국인의 만주 이민을 금하는데 목적이 있었다면 이조의 정책은 한인의 유출을 금하려던데 있었다.
이조는 변방정책을 어기고 두만강 및 압록강 대안에 이주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사형에 처하는 법규를 세워왔다. 현종11년(1670년)에는 전국에 걸친 흉작으로 만주에 이주하는 평안도민이 많았다. 이때 평양감사는 만주 이주자인 하득명을 처형하고 행정책임자 만포첨사 윤창형을 파면했다. 간도지역 이주자로는 1870년 12월 이동길의 효수가 첫 기록으로 나타난다.
1868년부터 5년간에 걸친 기근으로 말미암아 국시로 지켜지던 이조의 변방정책은 허구화 되기 시작했다. 1883년에는 압록강 대안지방에 3만명의 한국인이 살게 되었다.
이리해서 1875년 청조는 유민편적관을 보내 주민등록을 실시했고 2년 후에는 남만주에 안동·관전·회인·통화의 4현을 신설했다.
이때 이조는 압록강 대안을 28개 면으로 획정, 강계·초산·자성·후창 등 4군에 예속시켰다. 일인 항옥성복은 1만여 호의 요동 한인부락에선 한국고유의 언어 풍속이 유지되고, 부락자치제가 실시됐다고 쓰고 있다. 이것으로 이조와 청조 정책은 후퇴했으며 1883년3월14일 이조 서북경략사 어윤중은 청조의 봉천동 변도인 진본식과 협의, 중강 통상장정을 체결함으로써 변방정책이 폐기되었다.
1910년 8월29일의 한일합병은 한국인의 대량이주를 초래했다. 10년∼11년에는 4만9천명이 만주에 이주했고, 그후 매년 1만∼2만명이 이주했다. 3·1운동 전후에는 특히 급증했는데 18년에는 3만6천명, 19년에는 4만4천명, 20년에는 2만2천명이 이주했다.
이같은 사실은 간도와 만주에 대한 이주가 비록 흉년에도 원인이 있지만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한국인의 반항의식을 보여 주는 것임을 증명했다.
흉년으로 인한 이민도 중요하지만 1917년 이래 조선총독부가 실시한 국유림의 총독부직할 경영으로 생긴 한국인 화전민의 강제철거도 중요하다.
22년 3월말 현재 만주지역 한국인 홋수는 10만3천여호, 인구 65만1천여명으로 간도를 포함하는 길림성의 한국인은 7만2천8백호, 49만명으로 총 이주자의 75.2%였다.
중국인들이 간도 서부 만주일대에 진출했기 때문에 한국인은 간도 등 길림성에 많이 진출해 쉽게 정착기반을 얻을 수 있었다.
한국인은 봉천성 인구의 2.8%였던데 비해 길림성 인구의 6.l%로 중국인 정착밀도가 적은 곳에서 살아가기가 비교적 쉬웠다고 볼 수 있다.
1932년 3월 이른바 만주제국이 수립되면서 한국이민은 질과 양에 있어 변모를 보였다. 27년∼30년에는 연간 1만6천명이 증가한데 비해 33년∼36년에는 연간 7만1천명이 증가해 5배에 가까운 증가율을 보였던 것이다.
일제는 자국민의 만주이민이 어렵게 되자 한국농민의 대만이을이 국책으로 확립해 36년 9월 만주척식주식회사가 설립됐다.
이들은 소작농 아닌 한국자작농을 15년차 계획아래 15만호를 이주시킬 계획이었다. 이 결과 39년까지 l만4천호 6만5천명을 이주시켰고, 그후에도 연평균 1천6백호를 이주시켰다.
이래서 32년에 1백30만이던 한국이민은 42년에 26만이 증가돼 1백56만으로 늘었다.
특기할 것은 만주의 한국이민이 미작농업을 만주에 확대시킨 역할을 한 사실이다. 만철농무과가 32년에 낸 「만주의 수전」에서도 이 사실을 명기했다.
한국이민은 한국의 전통적인 영농법을 써서 만주 미작농업을 발전시켰으며 계와 같은 협동원리를 써서 집단생활 양식에 효율을 높였다.
이 계의 대여조차 한인 노무자를 농번기에 고용하는데만 사용했던 것이다. 한국이민은 간도 미작농의 90%, 요하에선 70%, 북만에선 1백%, 안동에선 20%였으며 35년도엔 10만5천정보에서 2백5만6천석을 수확했던 것이다. 만주 수전의 80.3%가 한인 경작이었다.
그러나 한국농민의 농업이윤을 수탈해 온 일본의 동양척식회사는 만주지역에서도 수리사업을 독점함으로써 한국이민의 이득을 잠식했던 점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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