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심의 포위망에 걸린 도주천리-추적 21일 박원식이 잡히기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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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부산 대구 권총 살인 강도 박원식(38)은 뜻밖에도 경북 예천군 산간마을에서 주민들의 손으로 붙잡혔다. 5천여 명의 군·경·예비군 합동수색대가 포위망을 펼치고 있던 황학산·삼도봉 일대와는 무려50㎞나 떨어진 곳. 박은 용감하게 덮친 오재룡·권상영씨 등 두 보충역에게 붙잡히자 『나는 박원식이다』며 스스로의 잘못에 고개를 떨구었다. 체포된 박은 도망 다니는 동안 굶주리고 지쳐 몹시 야윈 모습이었으나 『부산에서 경찰과 총격전을 벌인 이래 붙잡힐 때까지의 21일 동안 경찰의 검문, 검색을 당하지 않고 이곳까지 도피했다』고 경찰에 진술, 그의 교활한 정체를 다시 드러냈다.

<한쪽 다리 절며 집 앞 기웃거려>

<신고>
19일 하오8시쯤 경북 예천군 감천면 관현1동에 사는 이순한씨(35·여)는 이날 밭에서 잎담배를 따 가지고 돌아오던 길에 마을 한 복판에서 빈 도시락을 들고 다리를 절며 이 상세 씨(32) 집 앞을 기웃거리는 박을 발견했다.
이씨는 처음 수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박원식인 줄은 모르고 그냥 지나쳐가다가 마침 방위 소집 근무차 집을 나선 권상영씨(26)와 오재룡씨(25) 등 두 청년을 만났다.
이씨는 『우스개 소리지만 웬 사람이 다리를 절룩거리며 밥을 얻으러 다니니 가보라』고 알려주고 집으로 들어갔다.
한편 이날 아침 예천 경찰서는 예천읍 우계동 안홍전씨(71)로부터 밥 한 그릇과 양념장, 고무신 한 켤레, 밀짚모자 등을 도둑맞았다는 신고를 받고 긴장, 도경에 보고하고 관하 지서에 특별 경계령 을 내렸었다.
박이 신고되어 잡힌 경북 예천군 감천면 관현1동 은 예천읍에서 형주 쪽으로 8㎞ 떨어진 소백산맥의 기류. 부용봉 아래쪽에 있는 약70여 호가 사는 풍기통로에 접한 마을이다.

<총소리 듣고 주민들 합세>

<검거>
이씨의 신고를 받은 권씨 등은 근무에 나가기 앞서 친구5명과 함께 막걸리 한 되를 나눠 마신 뒤라 얼근한 김에 총도 없이 맨 손으로 자전거를 타고 3백m쯤 떨어진 이씨 집 앞까지 갔으나 찾지 못하고 헤매다 부근 조진룡씨(49)집 부엌 앞에 서 있는 박을 발견했다.
이때 박은 밀짚모자를 깊숙이 쓰고 조씨의 2여 숙희양(18)에게 『밥 좀 달라』고 했으나 『딴 집에 가보라』는 따돌림을 받고 있었다. 아무래도 수상한 생각이든 권씨는 앞마당 보릿단 뒤에 몸을 숨기고 오씨 혼자 다가가 『그릇을 주면 밥을 얻어주겠다』고 꾀자 박은 들고있던 도시락 통을 순순히 내밀었다. 오씨는 숙희양을 달래 밥을 가득히 얻어 준 뒤 박이 돌아서 나가자 20∼30m쯤 뒤를 슬슬 따라가다가 기회를 노려 재빨리 달려들었다.
오씨는 뒤에서 두 팔을 돌려 박을 꼭 끼어 앉고 권씨가 앞을 막아 옷 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순간 『총』하는 오씨의 고함소리와 함께 박은 옆구리에 감춘 권총을 빼 1발을 발사했으나 권씨가 재빨리 총을 든 오른팔을 뒤로 비틀어 총알은 빗나가고 말았다. 박이 재차 방아쇠를 당겼으나 불발, 이때를 노려 권씨가 박의 다리를 번쩍 들어 젖치고 20분 동안 2대 1로 엎치락뒤치락 어둠 속에서 필사적인 격투가 벌어졌다.
총소리를 듣고 뛰어나온 마을사람들이 이에 합세, 박을 때려뉘었다. 권씨는 마을 사람들에게 박을 묶어 맡기고 곧장 감천 파출소로 달려가 신고, 긴급 출동한 소장 안병욱 경사와 김광섭 순경에게 하오8시30분 인계했다.
권씨와 오씨는 격투 때 박이 권총을 빼는 것을 보고 혹시 간첩이 아닌가 생각했으나 권총 살인 강도 박인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으며 나중에 파출소에 가서야 박의 정체를 알게됐다고 말했다.
검문 한번 안 당해|금능선 선로 수에 들켰지만

<도주>
지난 11일 상오5시15분쯤 대구시 비산동에서 김 도금 여인을 살해한 박원식은 이날 새벽 택시 편으로 동대구역 쪽으로 빠져나가 철길을 따라 북쪽으로 나갔다. 미리 바꿔 입은 작업복의 농민차림을 한 박은 낮에는 철길 가의 둑 아래나 숲 속에서 자고 밤에는 철길을 따라 걸어갔다.
이러기를 나흘째, 박은 15일 상오9시40분쯤 금릉군 봉산면 복전동 경부선 태영 터널 남쪽 1백m지점에서 선로 수에게 정체를 들켰으나 권총이 있었기 때문에 느긋이 빠져나가는데 성공했다. 박은 경찰신문에서 지금까지의 제1, 제2 목격자를 만난 것은 사실이나 그 이후부터의 종적은 그가 계속 철길을 따라갔기 때문에 『사실과 다르다』고 말하기도 했다.
박은 충북으로 빠지는 길목인 괘방령 밑 으슥한 복산으로 일단 몸을 숨겼다.
경찰이 황학산 능선을 타고 충북으로 빠지는 것으로 보고도 경계 지역에 집중포위망을 치는 사이 박은 국도를 건너 동편 금산과 난함 산기슭을 돌아 소백산맥 줄기를 끼고 낮에는 숲 속에서 은신하고 밤에만 일하러 가는 농부처럼 꾸며 잠행을 계속했다.
박은 다시4일간 낮과 밤을 바꿔가며 북으로 올라가다가 19일 새벽 허기에 지쳐 처음으로 예천군 예천읍 민가에서 몰래 밥을 훔치다 꼬리가 잡히기 시작했다.
이에 앞서 지난 6월29일 부산범행 이후 21일 동안 잠적했던 박은 대구를 향해갔을 때도 구포를 지나 철길을 따라갔다고 밝힘으로써 도주경로는 계속 철길을 이용했음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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