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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스톱 서비스 탄생시킨 매트릭스 조직으로 바꿔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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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6호 23면

최범수 신한아이타스 사장

한국에서 금융지주회사법은 2000년에 제정되었다. 외환위기 극복 과정에서 금융권에 대한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단행할 때 한국의 금융시스템을 선진화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진행된 소프트웨어 개혁의 일환으로 이뤄졌다. 회계기준의 국제화, 사외이사 중심의 이사회 제도와 사업본부제의 도입, 여신심사위원회에서의 은행장 배제 같은 시스템이 이때 도입되었다. 이미 전 세계적으로 일반화되면서 그 유효성이 검증된 금융지주회사 제도를 우리나라에서도 가능케 함으로써 그동안 한국 금융의 발목을 묶어왔던 제약을 없애보겠다는 조치였다. 일례로 미국에서는 연방예금보험공사 가맹 은행 중 95%가 은행지주회사 형태로 운영되고 있다. 기실 지주회사는 세계적으로 은행 조직의 대표적인 경영지배구조로 자리 잡고 있다.

맨 얼굴의 경제 ⑤ 지주회사는 옥상옥(屋上屋) 인가?

미국의 은행지주회사법은 1956년에 제정되었다. 그전에는 은행지주회사가 없었을까? 아니다. 그전에도 있었다. 다만 1956년 법 제정으로 은행을 자회사로 둔 지주회사는 비금융 업무에 종사하는 자회사를 두지 못하고, 주(州) 경계를 넘어서 은행 영업 범위를 확장하지 못한다는 규제가 도입됐을 뿐이다. 미국 연방은행의 은행지주회사에 대한 규제 규정(regulation Y)을 봐도 지주회사 제도를 도입하기 위한 내용이 아니라 자본 충실도나 소유 지분 등과 같은 은행에 대한 규제를 은행지주회사에 확장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은행과 은행법 중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분명히 안다.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영국의 은행들이 산업혁명 과정에서 절대적으로 기여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프랑스ㆍ독일이 은행의 설립과 운영에 관한 매뉴얼(사용설명서)을 법으로 정한 것이 은행법의 유래다. 영국과 그 전통을 이어받은 미국의 정부는 처음부터 은행에 대해 자유방임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은행업자들 스스로 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자율적으로 규제해 오다가 사회적으로 문제가 드러나면 그 부분만을 법으로 규제하는 형태로 은행법을 발전시켰다.

그래서 영미법은 규제하는 목록만을 열거하는 방식의 네거티브 시스템이고, 대륙법은 허용 사항만을 열거하는 방식의 포지티브 시스템으로 전개돼온 것이다. 이에 따라 영국과 미국에서는 시장의 필요에 따라 금융상품이 개발된 후 문제가 발생하면 그 부분이 법으로 규제되는 반면, 대륙법의 전통을 따른 국가에서는 새로운 업무나 상품을 도입하려면 법이나 규정을 먼저 개정해야 하는 제약이 따르게 된 것이다.

영미법과 대륙법의 차이
대륙법 체제에서도 의당 지주회사법이 있었을 터인데 대륙법의 영향을 받았던 우리는 왜 도입하지 않았는가? 여기에는 일종의 ‘역사적 사고(historical accident)’가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일본에 진주한 맥아더 사령부는 일본의 군산복합체를 전쟁 촉발 원인 중의 하나라고 보고 이를 해체하기 위해 지주회사 제도를 배제했던 것이다. 해방 후 일본의 상법을 거의 그대로 가져온 한국은 전범국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지주회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아예 금지되고 말았다.

이후 지주회사 제도를 도입하자는 논의가 있었지만 경제력 집중을 억제한다는 명분으로 지체돼 왔다. 지주회사 제도를 활용하는 것이 오히려 경영 지배구조의 투명성을 제고하는 장점이 있다는 주장이 부각되면서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공정거래법 개정을 통해 일반 지주회사가 허용되었고, 이듬해에 금융지주회사법이 제정된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개별회사 본위의 규제 체계가 뿌리를 견고히 내렸기 때문에 지주회사 제도는 조심스럽게 첫발을 내딛는 수준의 도입에만 그쳤을 뿐 제도 도입의 취지가 여전히 구현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ㆍ일본만 업종별로 금융그룹 나눠
[그림1]은 우리나라 금융지주회사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조직도다. 한국 사람들은 누구나 당연시하는 조직체계지만 한국과 일본을 제외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의 금융그룹 조직도는 이와 전혀 다르다. [그림2]에서 보듯이 지주회사 산하의 업종별 개별 금융회사 대신 고객 중심의 기능별로 분류된 매트릭스(행렬) 조직으로 이뤄졌다. 크게 보면 개인 또는 소상인을 대상으로 한 리테일(소매)금융, 중견기업 이상이 고객인 기업금융, 그리고 자산운용과 보험 등을 묶은 3개 부문으로 나뉜다. 소매금융만 하는 은행이라면 리테일 금융에만 속하겠지만 한국의 대형은행과 같은 경우라면 업무가 3가지 분야에 나뉘어 배속된다. 아시아·유럽·북미 등의 지역 영업조직도 각각의 업무에 따라 소속 부문이 갈라진다. 고객·상품·지역에 따라 책임자가 있고 그 조직원들이 종횡으로 얽혀 있다고 해서 ‘매트릭스 조직’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들과 별도로 그룹 전체의 전략·재무·인사·리스크 관리 등을 총괄하는 임원이 따로 있어 개별 하부기업의 CEO들도 이들의 방침을 따라야 한다. 그룹의 경영방침은 사업라인의 장(長)과 중앙센터기능 책임자로 구성되는 그룹 경영회의에서 결정된다. 흔히 매트릭스 구조는 조직이 지나치게 복잡다기한 데다 보고도 여러 사람에게 각각 따로 해야 하므로 의사결정이 지체된다는 지적을 받는다.

하지만 수직 계열화된 방대한 조직일수록 효율성이 떨어지고 의외의 위험에 노출되기 쉽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 매트릭스 방식을 활용하는 것이다. 지주회사는 이렇듯 원래 중추기능을 하는 조직인데도 우리는 그저 계열사 위에 있는 옥상옥(屋上屋) 조직으로만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세계 보편의 지주회사 제도 도입해야
1990년대 중반에 미국의 씨티그룹에 자회사가 모두 몇 개인지 물었더니 500개쯤 된다고 했다. 최근 BNP파리바의 그룹 경영회의 담당 변호사에게 자회사가 몇 개인지 물었더니 1300개까지는 세봤는데 더 이상은 모르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지주회사 제도가 주식회사 제도와 나란히 발전해온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부서나 사업부, 자회사와 같은 조직 구조를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구사하고 있다.

예전엔 은행 지점에 가면 고객이 창구들을 돌아다니면서 일을 봐야 했지만 이제는 한 창구에서 거의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다. 처음엔 내부에서 직원의 역량 부족, 업무 부담 증가 등의 이유를 내세워 조직원들의 반발이 많았다. 하지만 원스톱 서비스를 통해 고객 편의를 제고한다는 취지가 확산되면서 외환위기 이후 모든 시중은행의 창구는 고객 중심 체계로 바뀌었다. 지금은 구청에 가도 통합 민원창구가 있을 정도다.

어떤 기업이 재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은행·증권·캐피털 회사를 따로따로 찾아다니는 것보다 한 사업 라인에서 모두 해결할 수만 있다면 국가적으로도 경쟁력을 더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감독은 어떻게 해야 할까? 선진국에서 이미 문제를 해결해 뒀기 때문에 이를 참조하면 될 것이다. 기본은 행위 규제에 있다. 금융회사 종류와 관계없이 예금·대출과 같은 동일 기능과 업무에 대해서는 동일한 규제를 적용하는 방식이다. 우리도 업종별 감독에서 벗어나 기능별 감독으로 이행하기 위해 15년 전에 금융감독기관을 하나로 통합한 바 있다.

그렇다면 공시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이 역시 금융업종별로 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도에 나와 있는 대로 한다. 경영진이 파악하는 방식 그대로 공시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분기 실적을 은행 이익 얼마, 증권 얼마 식으로 따로 떼어 내 공시할 때마다 금융시스템의 후진성을 드러냈던 셈이다.

정부는 곧 금융지주회사 제도의 새 틀을 짠다고 한다. 금융지주회사의 역할이 적극적인 지배인가 소극적인 관리인가? 개별 금융회사마다 독립적인 이사회를 구성해야 하는가? 고객정보 교류는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 금융그룹을 마치 하나의 회사(one enterprise)로 볼 것인가 아니면 자회사를 각각의 단일 사업체로 볼 것인가?

전 세계적으로 해답은 나와 있다. 오랜 시행착오를 거쳐 선진국 대다수가 채택하고 있는 방식을 적극 도입하는 것이 우리가 ‘갇혀 있는 갈라파고스’에서 탈출하는 첩경이다. 이 목표를 분명히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뉴욕 양키스의 입심 좋은 포수 요기 베라가 말했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가다 보면 아무 곳이나 가게 된다.”



최범수 예일대 경제학 박사. 전 KDI 연구위원. 1998년 외환위기 당시 금융감독위원장 자문관으로 금융 구조조정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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