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제13화>방송 50년(20)이덕근<제자는 필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미군정 치하>
이승만 박사가 해방직후 시민의 자격으로 귀국했을 때는 방송을 누구보다 아끼고 방송에 대해 이해가 깊었다.
이 박사는 방송시간이 10분이라면 9분 45초로 끝날 때까지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다시 녹음을 하는데 응해주곤 했다.
대기실에서 기다릴 때는 직원들이 청하기만 하면 글씨를 서슴지 않고 써주었다.
이 박사가 경성방송국에서 처음 방송한 것은 10월 17일이었는데 첫마디가 『나를 따르시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였다. 그러다가 이 박사가 경무대로 들어간 뒤에는 태도가 달라져서 방송에 잘 응하지 않았다.
이 박사는 돈암장에 있을 때 방송국관계자 전부를 초청, 한턱내기도 했는데 뒤에 태도가 바뀐 것이었다. 김구 선생이 환국한 것은 45년 11월 23일이었다. 당시로서는 가장 큰 「뉴스」거리로 방송국은 귀국제일성을 보내는 것이 보람이었는데 방송을 안내하던 「아나운서」가 『우리들의 지도자 김구선생을 소개하겠습니다 고 말한 것이 미국인 감독관과의 시빗거리가 되었다.
감독관은 38선 이남을 통치하는 것은 미 군정청이며 어떤 정당도 아니다라고 하여 「지도자」란 말에 시비를 건 것이었다.
한번은 여운형씨의 방송시간 1분 초과가 말썽이 되었다.
당시 감독관이던 「퍼시블」은 『어째서 1분이 초과하여 다음 방송시간을 침범했느냐』 고 이유를 알아내겠다고 여운형씨 집에 전화로 1주일이나 여씨를 찾았으나 번번이 「부재중」이란 대답에 마침내 지쳐 떨어졌다.
해방 후 가장 큰 중계방송은 48년 7월 5일 김구선생의 장례식이다.
방송국은 이때 처음으로 다원방송을 기도하여 경교장에서 효창공원까지 거리 여러 곳에 「마이크」를 장치, 중계했는데 홍양보「아나운서」가 방송도중 울어버린 사건이 있었다. 이때 민정호씨가 『산천초목도 운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는데 효창공원에서 하관식 중계를 위해 기다리던 위신록「아나운서」는 영구가 올 시간이 훨씬 넘어 도착한 것을 보고 그만 흥분, 『고대했던 영구가 마침내 왔습니다』고 하여 큰 실수를 했었다.
미 군정하의 방송은 어려운 일이 많았다. 한민 당의 발표가 있는가 하면 다른 정당의 방송이 있어 정계의 혼란이 반영되어 있었다. 할 수 없이 정당관계 강연이 끝날 때마다 『이 강연은 방송국의 의견은 아닙니다』라는 「코멘트」를 삽입하여 난을 면하는 방편으로 삼았는데 한번은 이승만 박사의 연설 끝에 이 「코멘트」를 했더니 『그게 무슨 소리냐』는 붓글씨로 쓴 호된 항의문이 날아온 일이 있었다.
6·25 직전으로 기억되는데 군경친선 좌담회를 가진 일이 있었다. 윤용로「아나」가 사회로 나갔는데 누가 먼저 발언하느냐로 싸우다가 군이 먼저 발언하고 뒤에 경이 발언했다. 그런데 서의 발언도중 녹음기가 고장났다. 당시 시경국장이던 김태선씨가 『왜 경찰의 발언도중 고장이냐』고 호통치며 『사상이 불순하다』고 경을 친일도 있었다.
1927년에 생긴 방송은 6·25까지의 23년 동안 재미있는, 어려운 일을 수없이 겪었는데 여기에 종사한 사람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방송인들은 아니었다.
윤백남씨·김정진씨·심우섭씨·김억씨 등이 그랬듯이 당시로서는 지식인·문학인이란 점에서 방송국을 거쳐갔을 뿐이었다.
누구도 「아나운서」가 되겠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대개의 경우는 「아나운서」직 외에 다른 전공이 있었다.
양경식씨는 해방 전 「아나운서」로 있었으나 해방 뒤 변호사가 되었고 이익령씨는 원래가 미술가였고 민정호씨는 극작가였다. 문제안씨는 무대감독이었고, 김억씨는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데뷔」시킨 시인이었다.
방두환씨는 해방이 되자 초대 대전시장을 지냈고 방인근씨는 방송국에서 「방송의 우」 일지를 편집하면서 소설을 썼다.
이하윤씨·윤태림씨는 대학교수로 가고 박충근씨는 법전의 8백m 달리기 전선대표선수로 어쩌다가 방송국에 들어왔었다.
이서구씨도 한때 방송국에 있었으나 극작·소설 등으로 나갔고 고제경씨·이상붕씨·문제안씨와 나는 신문사로 떠났다.
방송국에 있던 사람 중 이혜구씨·장사훈씨·장기근씨가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기술계에 있던 사람들도 많이 관계로 나갔다.
이규일씨(신문회관 사무국장), 이인관씨(문공부 기술담당관), 이남용씨(시민회관장), 한기선씨(중앙방송국 기술부장), 김두식씨(전 경무관·청소년회관장), 심경구씨(예비역 육군대령), 김석모씨(동아방송 기술담당부국장), 성기석씨(KBS 남양송신소장) 등이 지금도 활약하고 있다.
해방 전 기획과에 있던 신경석씨는 해방 뒤 속초방송국장 등을 역임했고 이계선씨는 해방 전 이리방송국 「아나운서」, 이천택씨는 해방 전에 계약과장 등을 지냈으며 김대순씨(작고·함흥방송국 계약과장), 황태영씨(해방 전 이리방송국 기술과장) 등이 활약했으나 이제 은퇴했다.
이들이 닦은 터전 위에서 동양방송·동양TV·문화방송·동아방송·중앙방송 등 「매스·미디어」가 활짝 꽃피고 있으며 이제 참다운 방송인들이 활약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 <끝><다음은 전택보씨의 무역이야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