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무력전쟁에 지상군 파견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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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장차 「아시아」지역에서 무력분쟁이 발생하는 경우 미국은 군사원조는 제공할 것이나 지상군의 파견은 없을 것이다』-. 「멜빈·레어드」 미 국방장관의 상원의원은 미국이 그 방위의 지주역할을 맡아왔던.「아시아」지역 국가들에 커다란 충격파를 일으켰다.
그것은 지금까지 『「아시아」인의 「아시아」』란 말로 미장되어왔던 「닉슨·독트린」 이 「베일」을 벗고 그 본질을 극명하게 노출했을 뿐 아니라 구라파 우위에 근간을 둔 미국의 대「아시아」정책의 급격한 전환이 힘의 진공, 오산전쟁유발의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 속에 이들 국가를 직면하게 했기 때문이다. 「레어드」증언의 핵심은 무력 분쟁에 미 지상군을 파견치 않겠다는 지상군부투입원칙과 「아시아」국가와 맺은 조약은 「나토」형의 군맹이 아니라 「군사원조조약」이라는 두 가지 점으로 요약된다.
지상군 불 투입 원칙은 「닉슨·독트린」에서 이미 그 골격이 형성되어있다.
69년 7월 25일 「닉슨」 미 대통령의 「괌」도 선언은 제3항에서『…우리는 조약에 따라 군사 및 경제원조를 제공한다. 그러나 위협을 받은 당사국은 방위를 위한 인력제공의 근본책임을 져야할 것이다…』고 했다. 이 말을 뒤집으면 미 지상군 불 투입원칙에 직결된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그 내용에 어느 정도 해석의 여지를 남겼고, 특히 그것이 「라오스」·「캄보디아」·태국 등에만 제한 적용되는 것으로 이해되었고, 그 뒤 「대외 무기판매법」의 「쿠퍼·처치」수정안에 의해 「라오스·타입」으로 굳혀졌던 것.
「레어드」증언은 결국 「닉슨·독트린」의 내용을 정면에서 명확하게 했을 뿐 아니라 「라오스·타입」의 제한을 허물고 일반화함으로써 그 적용을 「아시아」대륙 모든 국가에 확대한 것이다.
한미 방위조약 제3조는 『…합의에 따라 한국은 육군·해군·공군을 배비하는 권한을 미국에 허여 하며…』라고 규정하고 있고 한미합의 의사록 제4항은 『…미국의 의도와 정책으로 군사력을 제공한다…』고 되어있다.
양국 간의 조약에도 미 지상군의 투입을 의무로 규정한 일이 없고 군사력의 제공도 미국의 「의도와 정책」에 따라 그 범위가 결정되도록 되어있는 만큼 「레어드」 증언내용은 조약의 어느 부분과도 상위 되는 점이 없다.
다만 53년 16개 참전국 공동성명 한미방위조약 체결에 이어 세 차례의 박·「존슨」 공동성명, 세 차례의 한미국방각료회담, 최근의 「주한미군감축에 즈음한 한미양국선언서」에 이르기까지 18년 간 16차례의 양국선언에서 밝혀진 미국의 대한방위공약의 기조가 지상군 개인에 있었다는데 문제가 있다.
장구한 기간 안보를 핵으로 하여 형성되어온 양국 관계가 「레어드」증언에서 표명된 미 정책의 급변으로 중요한 부분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것은 미국의 대외관계를 평가하는 역사적 사실로 기록될 것이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국가가 미국과 체결한 조약이 「몬로·타입」으로 「나토」형과 구분되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
「레어드」증언 이라기보다는 미 정책의 변화는 대내외적인 배경을 갖고 있다. 대 중공 화해「무드」 촉진과 「아시아」의 긴장완화에 제1의 초점이 있는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69년 11월의 「닉슨」·「사또」공동성명이 중공·북괴간의 소위 「대미일 항전결의」 (70년 4월 주은래 북괴 방문에 따른 공동성명)를 일으켰다는데서 중공주변에 대한 미군의 포진이 중공의 위협 감을 증진시키기는 할지언정 긴장완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이 도출된 것 같다.
「핑퐁」외교 이후 여행제한 철폐, 금수조치해제 등으로 대 중공 접근을 적극화해온 미국은 군사 면에서도 주월 미군 28만 철수를 비롯해 한국에서 2만에, 일본서 1만 2천, 태국 1만 6천, 「필리핀」9천, 「오끼나와」에서 5천명의 병력을 감축함으로써 중공의 대미 위협 감을 완화시키려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이번 「레어드」증언은 『중공의 주변에서 미군의 군화소리마저 들리지 않도록 하겠다』는 의사의 표현이라고 하겠다.
중공과의 해빙을 통한 긴장완화가 「아시아」안보를 확보하리라는 판단의 근저에는 미국의 「유럽」 우위정책이 도사리고있다.
「유럽」에 현재수준의 미군을 계속 유지할뿐더러 그것은 「닉슨·독트린」과는 아무런 상치됨이 없다는 정책표명 외에도 미국의 전략개념이 과거의 2·5전략 (1은「유럽」, 1은 「아시아」, 0·5는 자국방위)에서 1·5전략으로 크게 수정된 것은 세계의 한곳, 즉 「유럽」에서만 전쟁에 대비하겠다는 근본정책에 근거한 것이다.
중공을 화해 「무드」에 끌어들임으로써 「아시아」의 안보를 굳히겠다는 미 정책은 오산전쟁의 유발가능성에 의해 부단한 시험을 받게될 것은 명백하다.
새로운 정책의 요체라고 할 지상군 불 투입은 지금까지 미국이 행사해온 「아시아」에서의 전쟁 억지력을 현저히 약화시킬 것이고 힘의 공일을 틈탄 공산침략의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높아졌기 때문이다.
50년 1월 「애치슨」 미 국무장관이 『…이 방위선은 「얼류션」 열도로부터 일본을 거쳐 유구·「필리핀」에 이른다…고한 연설을 오판한 김일성이 한국동란을 발발시켰다는 역사적 사실은 비슷한 상황이 밀어닥친 오늘 6·25 21주년을 당해 심각하게 음미해 볼만하다.
다만 침략전쟁의 담보 역이었던 중공의 어제와 오늘이 동일하지 않다는 판단이 미국의 새 정책의 토대이고 보면 앞으로 취할 중공의 태도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게된다.
공산위협이 첨단에 맞서있는 한국은 6·25 당시 어깨를 나란히 싸워주었던 미국이 주한군 감축과 「레어드」 증언으로 태평양너머 강국으로 멀어져 갔다는 냉엄한 현실 속에서 자주외교, 자주국방의 길을 재촉해가야 할 중대한 시점에 섰다고 하겠다. <윤용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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