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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노키아 빈자리에 창업 '새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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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핀란드가 ‘노키아 쇼크’에서 깨어나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거함 노키아가 침몰한 뒤 오히려 기업가 정신과 창업이 만개하고 있다”고 22일(한국시간) 전했다. 노키아가 쓰러진 후 핀란드 경제도 수렁에 빠질 것으로 보는 관측이 우세했다. 노키아는 지난달 미국 마이크로소프트(MS)에 흡수됐다. 단돈 54억9000만 달러(약 6조원)에 팔렸다.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핀란드 경제가 옛 소련 붕괴와 같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내다봤다. 핀란드는 최대 교역 파트너인 소련의 붕괴 직후 장기 침체에 빠졌다. 역사가 20여 년 만에 재연될 가능성이 커 보였다. 1998~2007년 새 핀란드 국내총생산(GDP)에서 노키아가 기여한 몫은 25%나 됐다. 노키아는 핀란드 연구개발(R&D) 투자의 30%, 법인세의 23%를 담당했다.

 이런 노키아가 2007년 애플 아이폰 등장 이후 속절없이 추락했다. 약 7년 동안 생존의 몸부림을 치다 올 9월엔 MS의 수중에 떨어졌다. 핀란드인들이 더 이상 노키아만을 바라볼 수 없게 됐다. 하지만 요즘 핀란드 경제에는 새살이 돋아나고 있다. FT는 “노키아 울타리에서 일했던 인재들이 뛰쳐나와 창업에 나서고 있다”며 “수도 헬싱키가 요즘 유럽에서 가장 활발한 창업 도시 중 하나”라고 전했다.

 노키아의 전 기술자인 해리 발레니어스는 2011년 퇴직 이후 벤처기업을 설립했다. 다른 노키아 출신 2명도 참여했다. 주요 아이템은 무선 오디오 장비다. 스마트폰 사용자들이 이 장비를 사용하면 거추장스러운 이어폰 줄에서 해방될 수 있다.

 여성 기술자인 티나 질라쿠스는 노키아에서 습득한 테크닉을 바탕으로 요가 게임을 개발하고 있다. 그는 요즘 시제품을 바탕으로 한창 투자를 유치하고 있는 중이다. 그는 FT와의 인터뷰에서 “내게 노키아는 훌륭한 비즈니스 스쿨이었다”며 “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옛 노키아맨들로 이뤄진 벤처투자자들과 접촉하고 있다”고 말했다.

 노키아도 퇴직자들을 위해 벤처지원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퇴직자가 창업 대출을 받으면 보증을 서주었다. 최고경영자들은 개인 돈으로 펀드를 조성해 벤처투자자로 나섰다. 퇴직자 1만 명 이상이 이런 도움을 받았다는 게 노키아 쪽 설명이다. 핀란드 정부도 노키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정책적 노력을 배가했다. 퇴직자들에게 1년간 직전 급여의 70%를 주는 퇴직보험에 더해 이들이 창업에 나서거나 새 일자리를 잡도록 각종 지원책을 시행했다. 대학과 연구기관, 국책 금융기관들도 창업자들과 손을 잡았다.

 요즘 싹트는 벤처는 ‘핀란드의 새로운 경제모델’이 될 전망이다. 핀란드에는 이미 노키아의 바통을 이을 성공적 기업 모델이 존재했다. 대표적인 곳이 로비오엔터테인먼트다. 세계적인 스마트폰 게임인 앵그리버드를 개발한 곳이다. 지금 핀란드에선 쇠락한 제국 노키아를 떠난 정보기술(IT) 인재들이 벤처기업 수천 개를 세우고 제2의 앵그리버드를 만들어내기 위해 밤잠을 잊고 뛰고 있다. 노키아의 인재 독점 구도가 허물어진 뒤 새로운 산업 생태계가 빠르게 조성되고 있는 것이다.

 핀란드의 요즘 모습은 비슷한 처지의 나라들에 좋은 롤모델이 될 전망이다. 지난해 현재 한 기업의 매출액이 GDP의 20% 이상을 차지하는 나라는 6곳 정도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룩셈부르크(아르셀로미탈, 161%), 네덜란드(로열더치셸, 56%), 스위스(글렌코어, 29%), 노르웨이(스타트오일, 24%), 태국 (PTT, 23%), 대만(혼하이, 20%) 등이다. 지난해 한국 GDP와 견준 삼성전자 매출은 약 18%였다.

 로이터통신은 전문가들의 말을 빌려 “거대 기업이 사라진 이후 수많은 협력업체들이 어려움을 겪고 경제가 일정 기간 불황에 빠지는 게 일반적”이라며 “하지만 새살(창업)이 돋는 게 시장경제의 생명력”라고 설명했다.

강남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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