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제12화 조선은행(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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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최초의 중앙은행>
조선은행이 처음 설립된 것은 내가 입행하기 8년전이니까 1909년(명치42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은행권발행이나 국고업무를 맡고 있던 일본계 제일은행으로부터 이들 업무를 인계받아 그해 10월에 정식 발족한 구한국은행(조선은행 전신)은 우리나라 최초의 중앙은행이었다.
구한국은행이 문을 열기 이전에도 이미 여러개의 일반은행이 설립되어 영업을 하고 있었는데 대부분이 외국은행들이고 몇 안되는 우리나라 자본의 은행들은 자금난 때문에 영업이 부진했다.
우리나라에 근대화된 은행제도가 처음 도입된 것은 이보다 앞선 강화조약 2년후(1878년)에 일본침략의 전초기지로 상륙한 일본계 제일은행 부산지점이 그 시초였다.
그 뒤 제일은행은 경제침투가 본격화함에 따라 원산·인천·서울·목포·진남포 등지에 속속 지점을 열었고 역시 일계 은행인 제18은행·제58은행 등이 우리 땅에 진출해 왔다. 일본은행 외에도 향항·상해은행 등의 대리점과 「러시아」계 노한은행도 잠시 문을 연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 자본의 은행으로는 1897년에 문을 연 한성은행(지금의 조흥은행)이 처음이며 조선은행·제국은행 등이 있었으나 몇해 못가서 문을 닫았고 대한천일은행·한성은행(1903년 재건)·한일은행 등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어쨌든 한성은행은 구한국시대의 중앙은행 설립에 12년이나 앞선 민간은행이었다.
그런데 한국인은행의 영업부진과는 달리 일본계의 제일은행은 일제의 식민정책이 진행됨에 따라 업무량이 크게 늘어나 일반은행 업무이외에도 여러 개항장의 세관업무·지금은 매입·한국정부에 대한 대출, 나중에는 은행권발행(1905년)까지 맡아 화폐금융·무역 등 경제전반에 걸친 식민정책 수행을 맡아왔는데 점차 경제규모가 커지고 정부재정도 늘어나 경제침략을 본격화하기 위해서는 중앙은행 설립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한일합병이 있던 1910년의 토지조사 사업과 함께 조선은행의 설립은 이같이 실물·화폐의 양면에 걸친 경제침투의 두 거점이 되었다. 구한국은행은 2년뒤 이름을 조선은행으로 고쳤는데 이는 한국이라는 말이 왕조의 색채가 짙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당시 경성부 남대문동3정목 1백10번지, 지금의 한은 본관자리에서 문을 연 조선은행은 자본금이 1천만원, 불입자본은 2백50만원이었고 점포는 제일은행에서 이어받은 인천·평양·원산·대구 등 4개 지점과 진남포·목포·군산·마산 등 9개 출장소를 합쳐 모두 13개 점포에 불과했다. 행원·고용인까지 합쳐 직원은 모두 2백20명 정도의 「미니」은행이었으나 그 뒤 업무확대에 따라 직원수도 크게 늘어나 10년 뒤에는 1천9백14명에 달했다.
임원으로는 총재·부총재·이사·감사가 있었는데(지금과 같다) 초대 총재는 시원성굉으로 기억된다.
설립 당시의 직제는 영업국(영업과·계산과), 서무국(발행과·문서과), 국고국(국고과·일본금고과), 출납국(출납과·지금과), 조사실, 비서실 등이 있었다.
내가 처음 조선은행에 들어간 것이 열일곱살 때니까 1917년인데 그때 총재가 3대 총재인 미농부준길이었는데 이 사람이 바로 현재의 동경도지사 미농부 길의 백씨이다.
당시 나보다 먼저 입행한 선배로는 조선은행 총재를 역임한 윤탁병씨가 그때 환계주임으로 재직했고 그밖에 초대 조흥은행장 김교철씨와 조흥전신인 동일은행장을 지내신 고 김신석씨(현 외환은행 김홍준 감사선친)가 그때 계산주임으로 재직하고 있었으며 한국인 직원은 통틀어 7, 8명밖에 안 되었다. 입행 전에는 조선총독부 토지조사국에서 일했는데 나의 주판실력을 인정받아 조선은행에 발탁되었다. 당시 주판대회 때마다 내가 우승했을 정도니까 상당한 실력이었던 모양이다. 처음 근무한 곳이 영업국 계산과였는데 나중에는 출납국 등으로 옮겨 일했다.
입행당시의 주요 「포스트」는 모두 일인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한국인 직원들은 차별대우가 심해 주임(지금의 계장급)까지가 고작이었다. 당시 출납국 계산주임이던 고 김신석씨는 나의 직속선배로 여러 면에서 지도해 주었다. 지금도 변함없지만 당시에도 은행원에 대한 사회적 지위랄까 인기가 매우 좋아 여러 면에서 선망의 대상이 되어 왔다.
특히 조선은행은 일반은행과는 달리 중앙은행으로서의 긍지가 대단했고 이런 전통은 지금도 이어져 오고 있는데 당시에는 특히 군소은행들이 난립한데에서 더욱 그랬다. 단지 중앙은행으로서의 특이한 점은 지금과는 달리 법화인 조선은행권의 발행·국고업무 등 중앙은행 고유의 업무 외에 여수신 등 일반은행 업무까지 겸하고 있었던 점이다. 말하자면 엄밀한 의미의 중앙은행과는 약간의 거리가 있었다. <계속><제자는 필자>

<주=필자 안명환씨는 초대은행 감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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