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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풍은 가고<패자의 변>|정일형<신민당선대본부장>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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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강권체제는 평화적 방법으로 붕괴시킬 수 없다는 역사의 차가운 교훈이 이번 선거에서 다시 한번 확인되었다.
이번 선거결과는 지금까지 숱한 선거의 결과와 똑같이 부정선거의 시비를 반복케 했다. 매번 겪어온 부정선거의 시비를 또다시 되풀이해야하는 오늘, 헤아릴 수조차 없는 분노를 언제까지 4년마다 겪어야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나는 지금 깊은 슬픔을 감출 길 없다.
이번 선거는 한마디로 부정선거의 최고형태이다. 왜냐하면 부정의 증거조차 박멸시킨 완전한 지능적 범행이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의 결과가 당초 공화당이 예상한대로 1백만 표의 승리결과를 나타낸 데 대해 나는 공화당의 과학성에 찬사를 보내기에 앞서 이번 선거야말로 공화당이 보이지 않게 짜놓은 4·27「모의선거」각본에 선량한 국민과 야당이 찬조 출연한 결과밖에 안되었다는 생각이 앞선다.
「컴퓨터」까지 동원된 공화당의 부정선거계획에 대항해 김대중후보와 당원들은 최선을 다해 싸웠다. 오늘의 결과를 놓고는 아쉬운 점이 적지 않지만, 여러 가지 악조건 속에서 선전선투 한 것이다. 특히 김대중후보는 한 인간으로서 또 한 정치가로서 할 수 있는 최대의 노력을 다함으로써 하느님과 국민에게 티끌만큼의 부끄러움도 없을 만큼 영웅적인 용전을 했다.
이번 선거에서 공화당은 우리의 민족역사가 단절되지 않는 한 천추에 씻을 수 없는 죄악을 범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계속집권을 위한 최후수단으로 특정지역에 집중공세를 함으로써 좁은 땅덩어리에 짙은 지역대립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정책의 경쟁도 아니고 인물의 우열도 아닌, 철저한 지역감정을 악용해 표에선 이겼다 하더라도 공화당이 저지른 민족분열의 죄과는 그 독재보다도 더 무서운 비극을 잉태하게 된 것이다.
이번 선거야말로 가장 봉건적인 선거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선거결과 공화당이 계속 집권의 위치에 설지는 몰라도 이미 국민의 보편적인 동의기반을 잃어 버렸다고 보며 특정 지역의 맹목적인 투표에 매달린 반신불수가 돼버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박정희 후보와 공화당은 시종 김대중 후보와 신민당의 요구에 몰렸다. 4선 출마를 않겠다는 공약과 부정부패를 일소하겠다는 공약이 그러하다. 이점에서는 김대중 후보가 표에 졌더라도 주장에서 이긴 것이다.
나는 선거대책본부장으로서 지난 선거운동기간에 쏟았던 노력과 정성을 이젠 부정선거의 진상조사와 그 시정에 온힘을 다할 것이다. 왜냐하면 원천적인 부정선거의 근절이야말로 정권교체보다 더 중요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선거인명부작성에서의 유령유권자조작, 철저한 자금봉쇄, 국민적 양심으로 자발적으로 참관한 학생들에 대한 경찰과 공화당의 탄압 등은 이 땅의 선거풍토를 오래도록 더럽히게 하는 선거이전의 문제이기 때문에 나는 당락을 떠나 이번 선거를 계기로 공명선거의 기틀을 잡아 놓겠다.
끝으로 사지에서도 싸워주신 국민들, 특히 지성인 언론인 학생 그리고 가난한 대중들에게 뜨거운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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