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만에 되살아난 '깅그리치의 저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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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너 미 하원의장

“우리는 작은 정부를 위해, 오바마케어(건강보험 개혁안)를 막기 위해 끝까지 싸웠다. 하지만 이기지는 못했다.” 16일(현지시간) 존 베이너 미국 연방 하원의장(공화당·오하이오)의 목소리는 떨렸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 맞서 17년 만의 연방정부 셧다운(폐쇄), 사상 초유의 국가 부도를 배수진 삼아 벌인 베이너 의장의 싸움은 상처뿐인 패배로 끝났다. 워싱턴포스트는 그를 패배자로 규정했다.

 이날 밤 상·하원을 통과한 합의안에 오바마케어와 관련, 공화당이 주장해온 내용이 하나도 포함되지 않았다. 더 처참한 건 공화당의 단일대오가 무너졌다는 점이다. 베이너 의장은 공화당의 초강경 보수주의 유권자단체인 ‘티파티’의 지원을 받아 16일간 연방정부 셧다운을 주도했다. 하지만 결과는 강경파와 온건파의 분열이었다. 전체 435명 중 과반인 232명의 소속 의원들을 규합하지 못해 15일 밤 스스로 제안한 안을 표결에 부치지도 못한 게 단적인 예다.

 베이너 의장이 1996년 빌 클린턴 대통령과 예산 싸움을 벌이다 패배한 뉴트 깅그리치 전 하원의장의 전철을 밟을 것이라고 미 언론들은 보도하고 있다. 당시 깅그리치는 21일간 셧다운을 불사하며 맞섰지만 비판 여론에 밀려 백기 항복한 뒤 공화당이 중간선거에서 패배하자 하원의장직에서 물러났다.

 중간선거는 내년에 치러진다. 공교롭게도 셧다운 사태가 공화당의 패배로 끝난 이날 뉴저지주 연방 상원의원 보궐선거에선 흑인인 민주당의 코리 부커 뉴어크 시장이 당선했다. 정치 전문지인 폴리티코는 “오바마 대통령에게 사사건건 반대해온 공화당이 엄청난 후폭풍에 시달리게 됐다”고 평했다. 갤럽 조사에서 공화당 지지율은 셧다운 전보다 10%포인트 감소한 28%로 급락해 92년 이후 최저를 기록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파당정치에 대한 냉혹한 심판”이라고 평했다. 공화당의 린지 그레이엄(사우스캐롤라이나) 상원의원은 “우리를 되돌아봐야 할 때”라며 “이런 식의 파당정치의 길을 걸을 때 공화당은 장기적으로 큰 상처를 입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16일에 걸친 셧다운의 최대 피해자는 ‘미국’이라는 국가 브랜드다. 라이벌 국가인 중국으로부터 “문제아” 소리도 들었다. 파당정치가 경제를 볼모로 얼마나 부끄러운 싸움을 할 수 있는지도 보여줬다.

 이날 처리된 합의안은 시한부다. 내년 1월 15일까지 여야가 합의하지 않으면 연방정부 셧다운 사태가 재연될 수 있다. 합의안이 통과된 뒤 오바마 대통령이 “이제 정치권은 위기를 조장하는 정치를 중단해야 한다. 우리는 손상된 미국의 신뢰를 복구해야 한다”고 역설한 이유다. 합의안은 상원에서 81대 18, 하원에서 285대 144 표로 통과됐다.

워싱턴=박승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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