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국립 도서관서 신문 정리 40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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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국립 중앙 도서관 일람과에 촉탁으로 재직하는 이의영씨 (65·서울 마포구 망원동 75) 는 25세 때부터 40년 동안 다른 출판물과 함께 신문 보관 업무를 맡아온 「베테랑」.
1931년 일본「오오사까」에 있는 일본 청년 도서관 연맹에서 연수 교육을 받고 국립 중앙 도서관의 전신인 조선 총독부 도서관 (1923년 개관) 의 열람과 신문실 고원으로 도서 관계에 첫발을 내디딘 이씨는 5년 전 정년으로 동 도서관 장서 계장직을 물러났으나 최낙구·이창세씨 등 도서 관장의 후의로 계속 촉탁으로 근무케 되었다는 것.
일제 치하에서도 미국·영국·만주 등 외국 신문이 송부 됐으나 1부씩 밖에 오지 않아 일반 열람용으로는 내놓지 않고 보관용으로 제본해 두었고 국내 신문은 2백여 종이 왔으나 동아·경성 매일 신문 등 2개지만 보관하고 나머지는 2개월마다 휴지로 폐기 조치하는 등 초창기의 신문 보관은 대상 신문 수가 아주 적었다.
요즘은 모두 3백17종의 국내·외 신문이 배달되어 국내 지는 2개월 단위로,「페이지」가 많은 외국 신문은 1개월 단위로 제본하여 대부분이 창고에 보존되고 근착 지나 독자가 많이 찾는 신문은 열람용으로 내놓고 있다.
담당 직원도 1명에서 3명으로 불어났다.
신문 보관 업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호가 없어야하고 해진 것이 없어야하는 것이라는 이씨는 『요즘은 매일매일 결호를 「체크」해서 보급소에 요청하면 즉시 보충되지만 옛날에는 어려웠다』고 했다.
신문이 생긴 초창기에는 배달제가 없었기 때문에 직접 신문사에 가서 신문을 받아오느라 애를 먹었으나 가져온 신문을 독자들이 기다렸다가 다투어 보는 것을 볼 때마다 보람을 느꼈다는것.
또 과거의 신문은 몇 호 나오다 중단하는 경우가 많아 아무리 잘 보관하려고 애써도 제대로 되지 않았지만 질서가 잡힌 현재는 일하기가 좋아졌다 했다.
『해방 직후 반민 특조위에서 민족 반역자를 조사할 때는 순전히 신문 기록에 의해서만 조사했었다』는 이씨는 보관만 잘하면 그만큼 가치를 발휘하는 영원한 증거물이 신문이라 했다.
저명한 학자들까지 자기가 보관해둔 신문을 열심히 메모하는 것을 볼 때는 흐뭇한 마음이 난다는 것.
『신문이 절대적인 증거물이 되기 때문에 그릇된 보도를 하면 역사의 죄인이 되는 셈』이라는 이씨는 가정에서 신문을 보관할 때는 변질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햇볕이 쬐지 않는 건조한 곳에 두고 두꺼운 종이로 싸 두어야 한다고 했다.

<이돈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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