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써니 리의 중국 엿보기] ‘일본 때리기’ 한·중 다른 셈법

중앙일보

입력

몇 해 전 중국 국무원 산하 한반도연구센터 리둔추(李敦球) 주임은 필자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만약 한국과 일본이 전쟁을 한다면 미국은 어느 편을 들 것 같은가?” 그는 당시 방중한 미 의회 의원들에게도 이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그랬더니 ‘미국은 어느 편도 들지 않을 것’이라는 답변을 들었다는 것이다.

요즘 삐걱대는 한·일 관계는 미국의 고민거리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주요한 두 개의 동맹끼리 서로 등을 돌리고 있으니 미국으로선 중국을 억제하기 위해 편성해 놓은 ‘지역구 관리’가 제대로 안 되고 있는 셈이다. 말로는 ‘어느 편도 들지 않는다’고 했지만 사실 미국은 물밑에서 바삐 움직이고 있다. 지금까지는 일본을 향해 먼저 양보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일본 측 반응이다. 최근 일본을 방문해 정부 고위층을 두루 만난 미국의 한 인사는 “한·일 관계를 개선하라고 하면 일본 관계자들이 무척 싫어한다”고 전했다. 오히려 일본 측에서 “한국이 무척 거만하다. 한국이 성숙하지 못한 외교를 펼치고 있다”며 불평한다는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대목은 일본이 대중 관계 개선엔 적극적이라는 점이다. 이 인사는 “일본은 대중 관계를 개선하면 한국은 절로 따라올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이런 일본의 심리 기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웃나라인 한·중 양쪽에서 따돌림을 받는 가운데 굳이 한국을 무시하려고 애쓰는 모습 말이다.

박근혜정부 들어 한·중이 ‘밀월관계’에 접어들면서 한·일 관계의 냉랭함은 더욱 부각된다. 일본에서 온 안보 관련 학자들이 미국 측과의 세미나 자리에서 “한국은 이제 완전히 중국 편으로 돌아섰다”며 한·미 간 틈새를 벌리려 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원래 미국과 한국을 떼어놓으려고 노력해 온 나라는 중국이었는데 그 역할을 미국의 동맹국인 일본이 거드는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국 외교가 일각에선 한·중 밀월관계를 불안하게 보는 시각도 있다.

이 모든 흐름은 국제질서의 세력 전이 과정에서 전개되고 있다. 그 중심엔 ‘중국의 부상’이 있다. 기존의 ‘내 편’과 ‘네 편’이 재구성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혼란은 그 자체로서 미국에 도전하는 신진세력에는 전략적 득이지만 미국에는 불리하다. 미·중 사이에 낀 한국으로선 상당한 리스크다. 그 리스크를 헤징(hedging·분산)하기 위해 한국 쪽에서 내놓은 것이 ‘중견 국가 전략’이다. 그러다 보니 “한·중 밀월’에 대해서도 한국이 주도하는 ‘중견국가 전략’의 큰 그림에 중국이 호응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최근 중국이 보인 대북 강경책을 그 증거로 제시한다. 하지만 오히려 중국이 펼치고 있는 세계질서 재편 전략에 한국이 말려들고 있다는 반대편 해석도 충분히 가능하다.

앞서 언급한 리둔추 주임은 “한·일 사이에서 미국은 결국 일본을 선택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미·중 사이에서 한국의 전략적 선택은 미국이 아니라 중국”이라고 했다. 이 마지막 말이 그가 정작 건네고 싶었던 메시지였을 거다. 최근 중국 고위층 인사들을 만난 한국의 한 국회의원은 한국이 중국의 ‘일본 때리기’에 적극 동참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한다. 요즘 한·미, 한·중, 한·일 관계가 미묘하다. 한국은 미·중 사이는 물론, 이젠 중·일 사이에서도 헤징을 해야 할지 모른다. 한국 전략가들의 엄청난 지혜가 필요한 때다.

써니 리, 스탠퍼드대 아태연구소 팬텍펠로
boston.sunny@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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