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일상이 전쟁인 곳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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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4호 31면

얼마 전 러시아에서 휴가를 보내고 왔다. 서울로 돌아와 보니 사적인 공간도 너무 없고, 사람이며 자동차며 끊임없이 움직이고 소리를 지르고 빵빵대는 느낌이다. 소음에 짓눌려 머리가 어지럽다. 불길 앞에서 가죽이 열 때문에 오그라들 듯 내 삶의 공간도 쪼그라드는 것 같다. 1년 만에 찾아간 고국 러시아에선 오히려 처음 며칠간 나 혼자뿐인 느낌이 들었을 만큼 한국과 러시아의 차이는 컸다.

서울에 사는 외국인들은 종종 사적 공간이 들어설 자리가 전무한 생활 리듬에 대해 불평한다. 서울에선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다 바쁘다. 아이들마저 바쁘다는 게 놀랍다. 아이들에겐 공부 시간 외에도 자신을 알아갈 시간과 친구를 사귈 한가한 시간이 있어야 하는데도 말이다. 한국 아이들은 동년배 러시아 아이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잔다. 어릴 때부터 더 좋은 점수를 받고,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더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 경쟁한다. 하지만 자신이 정작 무엇을 좋아하는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할 마음의 여유는 없다. 한국 아이들은 마치 어른처럼, 또는 어른을 위해 산다는 느낌이 든다.

언젠가 미용실에서 젊은 한국인 미용사와 한국 생활의 어려움을 얘기한 적이 있다. 그는 “잠시 외국에 나갔다 오면 한국은 전쟁터 같다”고 했다. 그러곤 “그렇게 살고 싶지 않지만 아등바등하지 않으면 남에게 뒤처지는 것 같다”고 했다. 한국에서 바쁘다는 것은 사회적 성공의 기준이다. 남들처럼 바쁘지 않으면 사회에서 빠른 속도로 도태된다.

세계적 비즈니스 국가 모델인 미국은 어떨까? 미국의 권위 있는 매체인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의 조사에 따르면 대부분의 기업 관리자들은 과다 업무량에 대해 불평하면서도 업무 일부를 타인과 나누고 자유시간을 많이 가지라는 제안에 부정적이었다. ‘얼마나 바쁘냐’가 그 사람에 대한 사회적 수요, 즉 사회적 성공의 수준을 보여준다는 것이 이유였다. 결국 한국이건, 미국이건 사람들은 종종 자의로 바쁜 상황을 유지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한 사회 안에서 일부 집단이 그런 삶의 방식을 택하는 것과 사회 전체가 그렇게 사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그런데 만성적으로 바쁜 한국 사회의 이면엔 ‘전혀 할 일이 없는 상황’도 공존한다. 누군가 퇴직을 하는 순간 상황이 급변한다. 평생 일하는 데 익숙했던 퇴직자들은 작은 일이라도 하고 싶어 하지만 할 일이 없다. 자신을 위해 시간을 쓰는 법도 배우지 못한 이들은 그저 평생 열심히 일만 하다 어느 순간 전혀 할 일이 없는 사람이 된다. 끔찍하다. 그로 인한 공허함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 러시아의 은퇴 노인들은 보통 손자들을 돌보거나 ‘다차’라고 불리는 별장이나 주말농장에서 일한다. ‘다차’는 러시아 문화의 독특한 요소로, 노년층에게 일거리를 제공하는 중요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한국은 땅이 좁아 ‘다차’를 형성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할아버지·할머니가 되는 기쁨을 누릴 여유도 쉽사리 주어지지 않는다. 출산 연령이 점점 고령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소위 ‘삼포세대(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한 세대)’ 현상도 뚜렷하다. 게다가 요즘 한국에선 고령자뿐 아니라 청년들도 일자리 찾기가 쉽지 않다. 경쟁이 너무 치열하다. 이웃 일본만 해도 은퇴자들이 희망하는 일자리를 찾는 게 훨씬 수월하다고 들었다.

언뜻 보기에 이런 상황은 공간과는 큰 연관성이 없는 듯하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 물리적 자유는 결국 심리적 자유로 이어진다. 자신의 주위를 더 잘 돌아보는 사람은 자아실현을 이룰 가능성이 더 크다. 시·공간의 압박을 받는 이들은 그저 눈앞에 보이는 것만 서둘러 좇는다. 스트레스를 없애려면 움직이고 생각할 여유공간이 필수다.



이리나 코르군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의 국제경제대학원을 2009년 졸업했다. 2011년 한국외대 러시아연구소의 연구교수로 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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