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또순이「디자이너」민평자양의 모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로마」시「델감베로」가23번지. 대사관에서 적어준「이탈리아」의 또순이 민평자양(31) 의 주소였다. 「델감베로」가는 명화『로마의 휴일』에서「오드리·헵번」의「아이스크림」을 사먹던「스페인」광장계단의 바로 맞은편 골목. 「로마」에서도 가장 번화한 상점가인 이곳에서도 민양의「부티크」(고급양장점)를 찾아내는 것은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MIN』(민)이라고만 쓴 단촐한 간판이 묘하게도 금방 눈에 띄게끔「디자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소녀티가 느껴지는 민양은 마침 대여섯명의「이탈리아」여인들에게 둘러싸여 옷 모양을 골라주고 있었다.
밀어닥치는 손님들로 얘기 기회가 안 나자 가게문을 닫아야만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밤10시가 되어도 얘기할 시간이 안 나요』라고 말하며 기자앞에 앉았다. 「부티크」에 들어선지 3시간 만이었다.
ㄷ자 모양을 한 가게는 10평쯤 될까. 워낙 금싸라기 땅이라 돈이 있어도 더 넓힐 재간이 없다고 한다.
『싯가로 얼마쯤 되느냐고요?』 쑥스럽다는 듯이 한참 웃다가 권리금까지 해서 10만「달러」(약3천만원)쯤 된다고 하면서 말끝을 흐린다.
민양이「이탈리아」에 첫발을 디딘 것은 66년6월. 25세 되던 해였다.
처음부터 목적은 돈버는 것이었다.
가정형편으로 이화대 불문과를 2년만에 중퇴한뒤 약1년간 양장점에서 일한 적이 있으므로 삯바느질을 하더라도 설마 굶어 죽기야 하랴는 배짱이었다.
어학실력이 달려「이탈리아」어강습소부터 들어갔다.
민양의 오늘이 있기까지 가장 큰 고민은 그녀가 우선 당장의 생활을 위해 양장점의 바느질꾼으로 들어가느냐 아니면 도이 목적대로「디자인」공부를 하느냐를 결정할 때였다고 당시를 회고한다.
당시「하이·패션·스쿨」의 등록금은 매월 4만8천「리라」(약2만4천원).
수중에 든 돈은 꼭 5만1천「리라」.
학교앞에서 2시간을 망설이다 입학할 것을 결정하고 결심이 흔들릴까 보아 원서를 내기도 전에 4만8천「리라」의 등륵금을 선불해 버렸다.
남은 돈은 불과 3천「리라」. 다음날 아침 주반을 굶은채 첫 등교를 했을때 민양에게 기적이 일어났다.
선생 한분이 강의를 마치고 나가면서 민양을 부르더니, 자기가 주최하는「패션·쇼」에 「모델」이 되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1백68m의 훤칠한 키에 35-23-35의 균형 잡힌 몸매가 그녀에게 뜻밖의 행운을 안겨준 것이다. 그날밤 받은「모델」료가 2만4천「리라」(약1만2천원). 그간의 한달 식비를 넘는 액수였다. 『눈물이 쏟아지더군요. 그 선생님은 아마 네가「모델」로 뽑힌 것이 기뻐서 우는줄 알았던 모양예요.』
점점「모델」로서의 그녀의 인지가 높아졌다.
그녀는「이탈리아」뿐 아니라「프랑스」·영국·「스웨덴」·서독에까지 출장을 다닐만큼 잘 팔렸다. 동양인「모델」이 귀한 탓도 있어서 출연로도 나날이 높아져 5만에서 6만「리라」까지 받게됐다. 번돈은 저금통장에 거의 다 집어넣고 전과같이「이탈리아」의 싸구려 빵「로제타」만으로 살았다.
두번째 행운이 찾아왔다. 「이탈리아」의 유명한「디자이너」「안나·스피나」씨가 그동안 쌓아올린 민양의「디자인」솜씨에 감탄, 그녀를 자기「살롱」의 수석「디자이너」로 채용한 것이다. 이것은 상류사회와 안면을 넓히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69년 2년반 과정의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그녀는「버스·스톱」이라는「부티크」를「이탈리아」인과 동업으로 변두리에 차렸다.
의외의 성공을 거두어 1년 후에는 중심가인「넬감베로」가로 진출할 만반의 태세를 갖췄다.
그러나「이탈리아」에서「디자인」으로 큰 돈을 번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4년간 죽도록 모은 돈이 2만「달러」밖에 안됐다. 그래서 그녀는 장사밑천을 미국에서 뽑아내기로 결심, 도미「패션·쇼」를 구상했다.
이「아이디어」가 민양에게 결정적인 행운을 안겨다 주었다. 미국「우먼즈·클럽」의 후원을 얻어 60여벌의 옷을 만들어, 70년7월 미국으로 갔다. 안팔리는 날에는 죽도록 저축한 2만「달러」를 날려야 하는 일대 모험이었다.
그러나 민양의 계산은 보기좋게 적중했다. 수수하고 평범한 그녀의「디자인」이 예상외의 인기를 모았다.
4개윌간의 대도시 순회「쇼」를 마치고「로마」에 돌아온 그녀는 드디어 70년11월 점포의「오프닝·파티」를 열었다. 이날은 재이 한국인들의 총회 같았다. 멀리「밀라노」에서까지 달려왔다.
한·이 수교 84년 사에서 가장 흐뭇한 한국인의 모임이 되었다.
현재 1백20만「리라」(약60만원)의 월수익을 올리고 있지만 그녀의 검소한 생활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이탈리아」공무원의 월수입이 12만「리라」, 정평있는 변호사들도 1백만「리라」정도.
결혼 문제에는 일체「노·코멘트」. 다만 오는 8월께 일시 귀국할 예정이라고 여운을 남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