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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집 한간없는「안빈낙도70년」의 노학자 김상기박사 서울대에 서기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70평생을「안빈낙도」(안빈낙도)로 순수학문 연구와 후진 지도에 몸바친 노교수가 명예교수로 은퇴후 10년이 지나도록 몸 담을 집 한간 마련하지 못하고 늘 생계에 시달린 끝에 마침내 목숨처럼 아끼던 장서 1만4백70여권을 팔려고 내놓았다. 우리나라 역사학계의 원로 동빈 김상기박사(71·서울대명예교수)는 15일 『여러가지 괴로운 사정이 있어서「상당한 사례금을 받고 장서 전부를 서울대 부속도서관에 기증하기로 했다』면서『순수학문을 하는 학자들 가운데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김박사는「상당한 사례금」이 얼마인지를 밝히지 않고『학자가 책을 파는 것은 여자가 정조를 파는 것과 같다』면서 괴로움을 감추지 못했다.
서울대 문리대 동양사 연구실에서 지난 여름방학 동안에 분류 작성한 목록에 의하면 김박사의 장서는 모두 1만4백70여권으로 주로 동양사와 국사관계의 고서. 이 가운데는 6·25사변때 김박사가 품속에 지니고 다녔을 만큼 아끼던「제옥운기」(이조태종 정유본) 다산 정야용이 손수 붓으로 쓴「두주수자본」권근의「양촌선생입학강설」(세종7년간행) 정조대왕이 어렸을 때 배웠다는「속강목」등 문화재급의 희귀본이 5백여권이나 들어있다.
이밖에도 김박사는 송사대서인「태평광기」(전40책·1566년간행) 「책부원노」(전1백80책) 「문원영화」(전2백40책) 「태평어예」등을 전질로 갗추고 있어 방대한 중국 고대사 관계문헌 소장을 자랑하고있다.
김박사가 이처럼 귀중한 장서를 내놓게 된 것은 오직 학자의 양심만으로 세상을 살다보니 필생동안 자기소유의 집 한간 마련하지 못한 노후의 비애가 컸기 때문이었다. 김박사는 현재 서울대교수관사(종로구동숭동25의1)에 은거하고 있는데 이 집마저 곧 비우지 않을 수 없게되었다.
서울대종합「캠퍼스」건설계획으로 관사촌이 불하되는데 김박사에게는 대지2백78평, 건평32편의 관사(불하예정가격 2천1백여만원)를 불하받을 경제력이 전혀 없다.
집 마련은 고사하고 70고령인 지금도 7식구의 생계를 손수 꾸리고 있다. 1961년 정년퇴직한뒤 지금까지 명예교수로 서울대 대학원과 문리대 사학과에 각각 1주일에 1시간씩 출강하고있으며 건국대 대우교수, 부산 동아대 초빙교수로 1강좌식을 맡아 한달 수입 8만여원으로 청빈한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전북 김제에서 태어나 1931년 일본 조도전대 사학과를 졸업한 김박사는 1945년부터 서울대 문리대교수와 학장(52년)을 역임하면서 동양사 연구실을 지도, 우리민족의 대륙관계사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다.
1964년 서울대에서「동방문화교류사 논고」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고려시대사」「중국고대사강요」「동학과 동학난」등의 저서와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사학계를 이끌어왔다.
서울대 부속도서관장 전제왕교수는『김박사의 장서를 기증받아「동빈문고」를 설치하여 김박사의 학문의 후계자를 기를 계획을 지난해 10월부터 추진해왔다. 돈을 주고서도 살 수 없는 귀한 책을 내놓은 김박사의 후의에 보답하고 생계에 곤란을 받고있는 선생에게 최대한의 사례금을 드리겠다』고 말했다.
서울대 도서관은 동빈문고설치심의위원회(위원 김두종 이희승 서울대명예교수,고병익문리대학장,조명기동국대총장,김원룡국립박물관장)를 구성하여 김박사의 장서를 조사했다.
전교수는「상당한 사례금」은 독지가의 희사금과 한심석 서울대총장의 주선, 도서관 자체예산 등으로 마련될 것이라고 밝혔다.
서울대는 동빈문고 설치와 아울러 고 이상백교수가 소장했던 귀중본 8백여권을 부인 김정희씨(48)로부터 기증받아 이미 차려진「상일문고」에 포함시키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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