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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학도 의용병(5)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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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3사단 학병중대>(2)
71명의 3사단 학도의용군 중대원 중 전사 48, 부상 13, 포로 10명으로 중대 전원이 거의 희생된 포항여중 전투이야기를 계속 들어보겠다. 다행히 적 포로가 됐던 10명의 대원은 그후 대부분이 적진을 탈출, 생환했다. 그러나 전사한 48명의 유해는 한 구도 수용하지 못했다.
▲유명욱씨(당시 배재중학6년=3사단 학도의용군중대 제1소대장·현 사업·43) 『11일 새벽에 요란한 총성으로 퍼뜩 잠이 깼어요. 사실 처음에는 적의 총성으로는 생각지 않았어요. 벌써 포항시로 그들이 들어올리가 없을 테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예요. 김용섭 중대장의 명령으로 여중정면은 내 소대가 그리고 우측은 김일호군의 제2소대가 맡아서 전투를 시작했지요. 우리가 전투하고 있을 때 사단사령부는 후퇴해버려 통신도 두절되고 우리는 완전히 고립됐어요.

<48명 전사로 중대 궤멸돼>
김용섭 중대장은 사단사령부와 연락을 취한다면서 무전기를 들고 뒷산으로 올라가다가 목에 적탄을 맞아 중상을 입었어요. 이때부터 내가 중대장대리가 돼서 전투를 지휘했습니다. 적은 4면을 포위하고 죄어들더군요. 우리는 교정 옆에 있는 콩밭 속으로 기어 들어가 조준도 목표도 없이 마구 쏘아댔어요. 적의 공격이 너무 치열하니까, 정신을 차릴 수가 있어야지요. 이렇게 8시간 너머를 싸웠는데 적은 점점 코밑까지 다가왔어요. 이제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에서 육탄전을 각오했습니다. 총알도 바닥이 나고 수류탄도 몇 개 안남았으니까요. 우선 냇가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최후의 일전을 전개했습니다.
결국 이 전투에서 48명의 군번도 없는 학도들이 교복차림 그대로 전사했고 13명이 부상, 10명은 포로가 돼 중대전원이 손해를 입었어요. 이때의 전사자들은 아직도 이름을 다 확인 못하고 있습니다. 후일에 포항을 탈환해서 가보니까 시체는 그대로 있으나 모두 썩었고 신분증도 이슬과 비에 젖어 식별할 수가 없더군요. 나도 마지막 전투 때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됐어요. 10명의 동료와 함께 적에 끌려가는데 마침 미군기의 폭격이 있어 그 틈을 이용, 콩밭 속으로 숨었지요.
적은 콩밭에다 대고 마구 총질을 했지만 맞지 않았어요. 며칠동안 사선을 헤매다가 우군 제18연대를 만나 구출됐습니다.』 다시 3사단 학도의용군중대에서 최연소자(15)였던 김만규씨(현 대구염광교회목사·36)의 이야기.
『중대가 전멸한 것을 보고, 뒷산으로 다시 가야겠다고 슬슬 발걸음을 옮기는데 적의 사격을 받았어요. 기어서 소나무 밑에 숨었지요. 옆에서 2명의 북괴군복장을 한 자가 나타나면서 「손들어」하고 소리쳐요. 알고 보니 국군인데 후퇴하느라고 복장을 바꾸어 입었어요. 함께 도망치다가 숲 속에 숨어 시내를 내려다보니 태극기가 보여요. 국군이 다시 들어온줄 알고 만세를 부르며 뛰어갔더니, 포로를 잡기 위한 적의 위장전술입디다. 꼼짝없이 잡혀 총을 빼앗기고 끌려갔는데 거기서 우리대원 4명을 만났습니다. 조금 있다가 학도병 3명과 현역군인 4명을 그들 본부인 과수원으로 끌고갑디다.

<김일성 대학 보내준다 꾀어>
괴뢰군 대좌가 나오더니 아주 반갑게 인사하며 평양가면 김일성 대학에 보내줄테니 자기들에게 협조하라는 거예요.
이와는 반대로 괴뢰병사들은 「동무들 악질이요. 이 방망이 수류탄은 장개석을 때려 부순거요. 우린 팔로군출신인데 동무들이 당해낼 수 있겠소」하며 위협조예요. 그러면서 이자들은 중상 입은 우리 중대장 김용섭씨 시계를 벗겨와 가지고 서로 가지려고 다툽디다. 내가 올 때 김중대장은 중상으로 다 죽어가는걸 보았는데 그자들이 시계를 풀어봤더군요. 여기서 우리들은 영일군기계면 미현동으루 끌려갔죠. 다른데서 잡힌 90여명의 국군포로와 함께 30명의 북괴군이 삼엄한 경비를 하면서 끌려갔죠. 달전동고개를 넘다보니 20여대의 적 「탱크」가 포항으로 들어오고 있어요.
밤새도록 걸어서 12일 아침에 미현동의 「해방동무임시수용소」라고 간판이 붙은 집에 도착했어요. 커다란 민가인데 위채에는 19명의 미군포로가 있고 아래채에 우리를 처넣습디다. 곧 심문이 시작됐는데 대좌인 소장이 나를 보고 자기연락병을 하라기에 대답을 안했더니 그대로 따귀를 후려갈기데요. 심문 중에 국군포로 15명은 혈서를 쓰고 적편으로 넘어갔어요. 15일에는 8·15라고 저희들끼리는 소를 잡아 잔치기분을 냈지만 우리에게는 주먹밥 한 덩어리와 조그만 소기름덩이만 줍디다. 16일에 괴뢰 여군대위 두 명이 와서 군가를 가르치려고 했어요. 둘 다 백마를 타고 온 멋쟁이 여자들인데 우리가 잘 따라 부르지 않으니까 처음에는 권총을 빼서 공포를 쏘며 위협을 하데요. 그래도 말을 잘 안들으니까 이번에는 자기들의 신세한탄 겸 호소를 해요. 즉 그녀들도 평양여고 학생들이었는데 김일성 환영 나간다고 「트럭」에 태워 원산으로 싣고 가더니 그대로 여군에 집어넣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밤에는 고급군관이나 정치장교의 비위도 맞추어주어야 한다면서 눈물을 흘립디다. 그런 말을 들으니 마음이 언짢아서 좀 따라 노래를 불렀지요. 그런데 이튿날부터 그 여군들이 보이지 않아요. 소문으로는 둘 다 총살당했다는 거예요. 바로 그날 밤에 우리 포로 중에서 한 상사가 적편으로 넘어갔는데 아마 그 자가 여군을 밀고한 모양이예요. 16일 밤에 학도병인, 조성태씨와 다른 한 포로가 탈출을 했어요. 21일에는 난데없이 포로들을 다 죽인다는 소문이 확 돌았어요.

<포로 l0일 안에 국군진지에>
모두들 울고불고 야단이었어요. 나도 많이 울었는데 옆에 있던 같은 대원 안영길 형이 달래주더군요. 얼마 안 있다가 괴뢰군대위가 나오더니 「오늘 고향에 보내줄테니 가서 부모들을 만나오」라고 해요. 이제 정말 죽이는구나하고 가슴이 철렁 내려 앉읍디다. 묶여서 뒷산에 끌려 올라갔는데 보니까 벌써 숲 속에 큰 구덩이를 파 놓았어요. 소름이 끼치고 머리가 빳빳해집디다. 하늘과 땅이 노랗게 보이고요. 어떤 포로는 구덩이를 보고 풀썩 주저앉기도 했어요. 나는 마음속으로 하나 둘 셋을 세면서 「하느님 살려주십시오」라고 연거푸 기도를 올렸지요. 이때 미공군 「제트」기가 날아오면서 기총소사를 퍼부었어요. 또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지고요. 이러니까 그들은 프로들을 안 죽이고 다시 수용소로 데리고 갑디다. 나는 이날 밤에 황재호 대원하고 탈출계획을 짰습니다. 밤이 되니까 포로들을 이웃동네로 다시 이동시킵디다. 도중에서 나는 꾀병으로 배가 아프다고 막 뒹굴었어요. 황재호씨는 나를 부축하는 체하면서 뒤에 처지고요. 이렇게 해서 선두대열과 20여m의 간격이 생겼을 때 달음질을 쳐 언덕의 구덩이 속에 숨었습니다. 이때야 괴뢰경비병들이 눈치를 채고 달려와서 숲 속을 중심으로 사방에 다발총을 난사하다가 가버립디다. 우리들은 다시 뛰어서 굴속으로 들어갔는데 거기에는 한청단장이라는 분이 숨어있읍디다. 서로 얼싸안고 울었지요. 아침에 귀에 익은 M-1소총소리가 나서 나가보았더니 국군수도사단 18연대가 들어와요.
포로가 된지 꼭 10일만에 우군진지에 돌아온 거지요.』

<적군단장이 위협사격>
▲황재호씨(당시 강원태백중학4년=3사단학도의용군중대원·현 강원도정선흑산농장경영·41) 『우리 포로들은 두 손을 전깃줄로 꽁꽁 묶어 끌려갔는데 아주 거칠게 다룹디다. 이 악착같은 놈들 맛좀보아야 한다면서 총개머리로 마구 내리치기도 했어요. 북괴군2군단 CP가 있는 영일군 파계면미현동에 도착했는데 한참 있으니까 군단장 김무정이란 자가 나타나데요. 나를 보고 「귀관이 남반부군관이냐?」고 묻기에 「군번도 없는 학도병이다」라고 대답했죠. 그러자 그자는 「똘똘해 보이는데 인민군에 들어오면 높은 계급을 줄테니 귀순하라」는 거예요. 나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으니 풀어주든지 아니면 죽여달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정 죽고싶으면 죽여주겠다고 권총을 빼서 공포를 탕 쏘고는 가버리데요. 옆에 있던 여러 괴뢰군장교들이 나를 노려봅디다. 이날 밤에 나는 조남수 대원(현 석공 장성광업소 근무)과 탈출하자고 했죠. 이 친구는 북에 가면 김일성대학에 보내준다는 그들 꾐에 좀 마음이 동한 눈치였어요. 그런데 내가 오늘밤에 도망친다고 하니까 저녁에 갈 때에 자기 허리띠를 내 것에다 매어 놓았어요. 살며시 푸르는데 이 친구 잠이 깨어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고 간청을 해요. 그럼 같이 탈출하자 맹세하고 둘이서 빠져나왔죠.
이날 밤 공교롭게 안개가 끼어서 밤새도록 개울을 따라 헤매다가 날이 샜어요. 보니까 수용소에서 불과 1천m도 안떨어진 곳이예요. 사방에는 괴뢰병이 우글거리고 낮이라 꼼짝 할 수 없어 수용소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도망치려다 생각을 고쳐먹었다고 아무리 변명했지만 괴뢰경비병들은 우리들을 죽도록 매질합디다.
이렇게 첫번에는 실패했지만, 두 번만에 구사일생으로 탈출에 성공하여 우군18연대와 만났습니다. 특히 18연대에서 취사병으로 있는 모교동창 황만재군을 보니까 이젠 살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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