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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발표 날 예고하고 잠적한 '은둔의 물리학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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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노벨 물리학상 수상으로 ‘신의 입자’는 다시 주목을 받았지만 정작 영광의 주인공인 피터 힉스는 모습을 감췄다. 수줍음이 많고 겸손하기로 유명한 힉스는 이미 수상자로 결정되기 전에 “발표일인 8일에는 어떤 방법으로든 나와 연락되지 않을 것”이라고 잠적을 예고했다고 뉴욕타임스(NYT)는 전했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힉스의 친구들은 그가 스포트라이트를 피하기 위해 멀리 떠났다고 했다”며 “노벨위원회조차 그와 연락되지 않아 직접 수상 사실을 알려주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NYT는 그를 ‘물리학계의 J.D. 샐린저’로 비유했다. 『호밀밭의 파수꾼』 저자인 샐린저가 ‘은둔의 작가’라고 불린 것에 빗댄 것이다.

힉스의 수상 소감이라고는 그가 명예교수로 몸담고 있는 에든버러대가 발표한 성명이 전부였다. 내용은 “노벨상을 타게 돼 너무 기쁘다. 이를 계기로 ‘미지의 세계 탐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길 희망한다”는 것이었다.

 힉스는 1929년 영국 뉴캐슬 지방에서 태어났다.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BBC의 음향 기사였던 아버지의 일자리를 따라 이사를 자주 했던 데다 어린 시절 천식을 심하게 앓아 초등학교 교육을 제때 받지 못했다. 그래도 힉스는 똑똑한 아이였다.

 그가 이론물리학자로서의 재능을 깨닫게 된 것은 47년 런던 킹스 칼리지에 들어간 뒤였다. 당시 교수진은 학생들에게 아직 답을 발견하지 못한 어려운 물리학 문제들을 시험으로 냈는데, 힉스는 6시간 걸려 답안지를 작성하는 기록을 세웠다. 당시 문제들은 최근에야 해답을 얻은 물리학의 난제였다.

 그가 힉스 입자의 원리에 처음 접근한 것은 에든버러대에 재직 중이던 64년이었다. 그는 과학자들도 두 손 든 답이 없는 물리학 문제들에 몰두하는 아웃사이더로 여겨졌었다. 그때 힉스는 논란이 된 이론들 을 어떻게 수정할 수 있는지 찾아냈다.

유지혜 기자

이휘소 박사가 72년 쓴 뒤 명칭 굳어져

◆힉스 입자의 이름은=1960년대 초 세 그룹의 물리학자들이 동시에 힉스 입자를 연구했고, 64년 관련 학술지에도 피터 힉스를 포함해 모두 6명의 학자가 작성한 힉스 입자 관련 논문 세 편이 나란히 게재됐다. 이 때문에 초기에는 연구자들인 브라우-앙글레르-힉스의 머리글자를 따 ‘BEH 입자’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세 논문 중 힉스가 작성한 논문에서만 유일하게 질량을 가진 입자의 존재를 분명하게 제안해 점차 힉스 입자로 불리게 됐다. 특히 한국의 물리학자 이휘소(1935~77) 박사가 72년 발표한 ‘힉스 입자에 미치는 강력(강한 핵력)의 영향’이란 논문에서 짧고 쉬운 ‘힉스 입자’라는 이름을 사용해 70년대 중반 이후 힉스 본인을 포함한 다른 학자들도 이 이름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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