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RN, 1964년엔 '힉스 논문' 퇴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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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힉스 입자의 존재를 예견함으로써 올해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피터 힉스가 2008년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를 방문했을 당시 강입자가속기(LHC)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왼쪽). 또 다른 수상자인 프랑수아 앙글레르가 8일 벨기에 브뤼셀의 자택 발코니에서 축하객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사진 CERN·로이터]

“내 살아생전에 이런 일(힉스 입자의 발견)이 생기다니, 정말 믿기 힘들다.”

 1964년 힉스 입자의 존재 가능성을 예견했던 피터 힉스 에든버러대 명예교수는 지난해 7월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를 방문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CERN은 이날 힉스 입자 발견 사실을 공개하며, 약 반세기 전 이 입자의 존재 사실을 예견했던 노(老)학자들을 초청했다. 8일 노벨상을 탄 힉스와 앙글레르 외에 칼 헤이건(76)과 제럴드 구럴닉(77) 총 4명이었다. 앙글레르와 함께 연구를 했던 로베르 브라우는 2011년 세상을 떠났고, 헤이건·구럴닉과 공동 연구를 했던 톰 키블(81)은 건강이 나빠 참석하지 못했다. 힉스의 발언에는 세상이 만들어진 근본 원리를 확인하기 위해 인류가 땀 흘려온 세월에 대한 감회가 있었다.

 힉스의 이론에 따라 힉스 입자를 발견한 것은 CERN이지만 49년 전엔 달랐다. 힉스는 입자가 질량을 얻는 원리(힉스 메커니즘)를 밝힌 논문을 완성하고 게재를 요청했지만 CERN의 학술지 에디터는 가차없이 거절했다. "물리학과 명확한 연관성이 없다”는 이유였다. 분노한 힉스는 CERN에 보냈던 논문에 딱 두 문단을 더 붙여 경쟁지인 미국의 저널에 발표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그가 홧김에 추가한 두 번째 문단에서 바로 힉스 입자를 처음 언급했다고 한다.

 ◆질량은 어디서 오나=힉스 등이 밝혀낸 입자가 질량을 갖는 원리는 우주의 탄생과 진화를 설명하는 대표적인 이론인 ‘표준모형(standard model)’의 마지막 ‘빈 고리’였다. 표준모형은 137억 년 전 대폭발(빅뱅) 때 여러 입자들이 만들어졌고 이들의 상호작용으로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만들어졌다고 설명한다. 이 입자들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12개의 기본 입자(쿼크 6개, 렙톤 6개)와 이들 사이에서 상호작용을 담당하는 4개의 매개 입자로 구성된다. 이 입자들은 모두 질량을 갖는다. 질량이 없다면 원자 주위를 도는 기본 입자인 전자는 원자에 묶여 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알고 있는 모든 물질들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표준모형은 이런 질량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 설명하지 못했다.

힉스 입자의 존재를 추적해온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강입자가속기에서 일어날 것으로 추정되는 현상을 표현한 이미지. 두 개의 고에너지 양성자를 충돌시켰을 때 생성되는 다양한 입자들의 궤적을 묘사한 것이다. [사진 CERN]

 힉스는 이 난제에 대해 특수한 장(場, field)과 기본 입자의 상호작용을 통해 질량이 생긴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이 장(힉스장)과 상호작용을 많이 하는 입자는 더 많은 질량을 갖게 되고, 적게 하는 입자는 질량을 적게 갖는다. 미국 하버드대 물리학과 종신교수인 리사 랜들은 이런 힉스장의 성격을 끈적끈적한 유체로 비유해 설명한다. 이 유체와 상호작용을 하는 입자는 속도가 느려지며 질량이 커진 다는 것이다(『이것이 힉스다(원제 Higgs Discovery)』, 사이언스북스).

 ◆힉스 입자 왜 찾기 어려웠을까=힉스는 힉스장이 만드는 특별한 입자(힉스 입자)가 존재할 것으로 예견했다. 이 입자도 힉스장과 상호작용해 질량을 갖는다. 학자들은 그 값을 125GeV(기가전자볼트, 1GeV=10억eV)로 추정했다(아인슈타인 방정식(E=mc2)에 따라 에너지값은 질량값으로 환산 가능). 표준이론상의 기본 입자와 다른 성질을 가지면서 이런 질량값을 갖는 입자를 찾는다면 힉스의 이론이 맞음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힉스 입자는 쉽게 발견할 수 없었다. 너무 불안정해 만들어지자마자 다른 입자로 붕괴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학자들은 힉스 입자가 붕괴해 만들어진 입자들을 역으로 추적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총 길이 2.7㎞의 세계 최대의 입자가속기인 거대강입자가속기(LHC)를 가진 CERN이 선봉에 섰다. LHC는 양성자를 빛의 속도에 가깝게 회전시킨 뒤 서로 충돌시키고, 그 후 쏟아져 나온 입자 다발 속에서 힉스 입자의 흔적을 찾았다. 지난해 7월 CERN은 힉스로 추정되는 입자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어 올 3월 추가 데이터 분석 끝에 이 입자가 “힉스 입자임에 분명하다”고 확인했다. 노벨상위원회는 그간 실험적으로 입증된 이론에 대해서만 상을 줘왔다. 올해 앙글레르·힉스의 수상은 힉스 입자 발견이 학계에서 공인됐음을 의미한다.

 ◆ 앞으로 남은 과제는=힉스 입자의 발견을 통해 완성된 표준모형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물질에 대한 해석만 담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일반 물질은 우주 전체의 5%밖에 되지 않는다. 인류가 아직 그 정체를 규명하지 못한 암흑물질이 25%, 암흑에너지가 나머지 70%를 차지한다. 고등과학원 물리학부 고병원 교수는 “앞으로 인류 앞에 남은 과제는 이들의 정체를 규명하고, 그 생성 원리를 밝히는 것 ”이라고 말했다.

김한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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