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세상읽기

'부자 감세'의 진상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4면

[일러스트=강일구]
김종수
논설위원

요즘 여야 간에 첨예한 쟁점이 되고 있는 기초연금 논란의 근본 원인은 뭐니 뭐니 해도 ‘머니(돈)’다. 생각 같아선 모든 노인들에게 충분히 돈을 나눠주면 오죽 좋을까마는 아쉽게도 그만한 돈을 마련할 길이 없다는 게 문제다. 그래서 여당인 새누리당은 그동안 신줏단지 모시듯 지켜오던 ‘공약 완전이행’이란 구호마저 슬그머니 내려놓고, 기초연금의 부분·차등 지급으로 후퇴했다. 그런데 야당인 민주당이 ‘무슨 일이 있어도 공약은 이행해야 한다’며 여당의 골칫거리를 자발적으로 떠안더니, 놀랍게도 그 해법까지 제시했다. 민주당의 제안인즉, “MB정권이 무리하게 추진한 부자 감세(減稅)만 철회해도 노인들에게 드릴 돈은 충분하다”는 것이다. 귀가 솔깃한 얘기다.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은 ‘공약 파기’라는 불명예를 피할 수 있는 묘수를 민주당이 만들어 준 셈이다.

 과연 그럴까. 아쉽게도 민주당의 ‘부자감세 철회’ 주장은 사실과도 어긋날 뿐만 아니라, 실현될 가망도 없다는 게 문제다. 우선 MB정부가 부자들의 세금을 깎아줬다는 말부터 틀렸다. MB정부가 이른바 ‘부자 감세’를 시도한 것은 사실이다. 경기 회복을 위해 소득세와 법인세의 세율을 낮추려 했다. 그런데 당시에 벌써 민주당이 ‘부자감세 철회’를 요구하고 나서는 바람에 MB정부는 감세를 제대로 시작도 못해보고 접었다. 소득세는 중산층 이하의 세율은 낮춘 대신 고소득층(세법상 과표 8800만원 이상)의 세율은 손대지 않았고, 3억원 이상 초고소득층에 대해선 새롭게 최고세율(38%)을 신설했다. 법인세도 과표 2억원 초과 기업에 대한 세율을 일률적으로 22%에서 20%로 낮추려다 ‘부자감세’로 지목되는 바람에 과표 200억원을 초과하는 대기업에 대한 세율은 그대로 두고, 200억원 이하 중견기업의 세율만 낮췄다. 고소득 개인과 대기업을 민주당이 지칭하는 부자라고 간주한다면 MB정부에서 ‘부자 감세’를 한 적이 없는 것이다. 부자들에게 깎아준 세금이 없는데 뭘 철회하라는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만일 민주당이 주장하는 ‘부자 감세’가 중산층 이하에 대한 소득세율 인하와 중견기업에 대한 법인세율 인하를 지칭하는 것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중산층과 웬만한 중소기업도 ‘부자’로 치부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민주당의 ‘부자감세 철회’는 사실상 연 소득 1200만원 이상의 국민과 과표 2억원을 넘는 중소기업 대부분에 대해 세금을 더 걷자는 말이 된다. 과연 정말 그러자는 것인지 궁금하다.

 여기서 세금에 관해 일반적으로 잘못 알고 있는 오해 두 가지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오해를 풀어야 앞으로 세금에 대한 논의가 엉뚱한 정치구호로 엇나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세율을 올리면 세금이 더 걷힐 것이란 오해다. 알다시피 세금은 과표(세금을 물리는 대상금액)에 세율을 곱해서 결정된다. 과표가 일정하거나 늘어날 때 세율을 올리면 당연히 세수(稅收)도 늘어난다. 그런데 온갖 다른 요인이 겹쳐 과표가 줄어들면 세율을 올려도 세수는 일정하거나 오히려 줄어들 수가 있다. 천재지변이나 경기 악화로 수입이 줄면 낼 세금도 줄어드는 것이다. 세율 인상 자체가 과표를 줄이는 효과도 있다. 기껏 열심히 일해봐야 세금으로 다 빠져나간다고 생각하면 굳이 돈을 더 벌 의욕이 없어지는 것이다. 세금 내 본 사람이라면 다 알겠지만 세금을 자발적으로 더 내고 싶은 사람은 없다. 세율이 오르면 세금을 가급적 덜 내려는 유인(誘引)도 커지게 마련이다. 특히 경기가 나쁜 상황에서 세율인상은 십중팔구 세수 감소로 이어진다. 이는 최근 세입이 왜 급격히 줄어드는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또 한 가지는 ‘부자’들에 대해선 세금을 얼마든지 더 걷어도 된다는 오해다. 우선 누가 부자인지부터 헷갈린다. 1년에 돈을 얼마나 버는 사람이 부자인가. 또 대기업은 부자이고 중소기업은 부자가 아닌가. 재벌기업은 부자이고, 주인 없는 대기업은 부자가 아닌가. 도대체 뭘 기준으로 부자를 가른단 말인가. 설사 억지로 기준을 만들어 부자의 범위를 정한다 치자. 이들에게 무턱대고 세금을 더 물리는 것은 과연 온당한가. 돈을 많이 버는 사람과 기업은 범죄행위를 통한 부당이득이 아니라면 대체로 남보다 더 열심히 일했거나 더 효율적으로 장사를 했다고 봐야 한다. 이들은 지금도 세금의 대부분을 부담하고 있다. 여기다 남보다 일을 더 열심히 잘한 죄(?)를 물어 징벌적으로 세금을 더 물리는 것은 경제적 합리성이나 도덕적 기준 어느 것에 비추어도 옳지 않다. 세금은 곳간에 숨겨놓은 재물을 마음대로 꺼내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일한 대가로 얻은 수입을 국가가 일방적으로 징발하는 것이다. 정당한 목적과 합리적인 기준에 따라 세금을 물려야 하는 이유다.

 미국의 경제학자 커트 하우저는 1950년부터 2007년까지 미국의 세수와 국내총생산(GDP) 추이를 비교한 결과, 조세부담률이 세율 변동과 무관하게 GDP의 19.5%로 일정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세수는 결국 세율이 아니라 경제성장과 궤를 같이한다는 뜻이다. 복지 확대를 위해 세수를 늘리려면 무작정 ‘증세’를 내세우기보다 성장률을 높이는 것이 첩경이다.

김종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