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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칭 모델은 보시라이 아닌 황치판이 만든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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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좌파(左派)’는 어떤 모습일까. 추이즈위안(崔之元·50) 칭화(淸華)대 교수를 만나기 전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가 중국 지식계의 한 축이라는 ‘신좌파’를 대변하고 있어서다. 인민복을 입은 마오쩌둥(毛澤東) 이미지일까, 아니면 사회주의를 부둥켜 안고 있는 한물간 지식인일까. 그러나 커피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그를 보며 이런 선입견은 여지없이 부서졌다. 깔끔한 머리에 미소 띤 얼굴, 밝은 복장,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 … .

중국 지식인 사회에선 요즘 논쟁이 뜨겁다. 미래 중국이 갈 방향을 놓고 백가쟁명(百家爭鳴)식 토론을 벌이고 있다. 대표적으로 충돌하는 ‘학파’가 신우파와 신좌파다. 자유주의 성향의 지식인들은 국가의 지나친 개입에 반대하며 시장 역할을 강조한다. 반면 신좌파들은 공평(公平)과 국가 역할론을 주장한다. 신좌파들이 발전모델로 거론하는 곳은 바로 보시라이(薄熙來)가 이끌던 충칭(重慶)이었다. “신좌파의 이념이 ‘충칭 모델’로 구체화됐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충칭 모델의 주창자인 추이즈위안 교수를 만났다. 그와의 대화는 지난달 23일 오후 한국고등교육재단(이사장 최태원) 회의실에서 두 시간 동안 진행됐다. 이날 인터뷰는 보시라이 재판 결과로부터 시작됐다. 다음은 일문일답 요지.

농민공에게 도시 주민과 동등한 대우
-보시라이 전 충칭시 당서기에게 이론적 틀을 제공해준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종신형을 받은 걸 어떻게 평가하나.
“나는 개인적으로 친한 관계는 아니다. 그가 당서기로 있을 때 충칭시 국유자산관리위에서 파견 교수 형식으로 1년 반 일했다. 나는 학자적 입장에서 그의 정책을 바라봤을 뿐이다. 게다가 난 공산당원도 아니었기에 정책결정 과정에 참여하지도 않았다.”

-그가 종신형 판결을 받은 뒤 ‘충칭 모델’도 종말을 고한 것인가.
“노(No), 절대 그렇지 않다. 중국 언론조차 ‘충칭 모델은 보시라이의 것’이라고 오해한다. 하지만 충칭 모델은 그가 충칭에 오기 전인 2007년 3월에 시작된 거다. 후진타오(胡錦濤) 당시 국가주석의 지시에 따라 그해 7월 국무원(중앙정부)이 충칭을 ‘도시·농촌 공동발전 시범구’로 지정했다. 그게 충칭 모델의 시작이다. 보시라이가 충칭으로 온 건 2007년 12월이었다. 그가 충칭 모델을 발전시킨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충칭 모델=보시라이’ 등식은 성립할 수 없다. 지금 국무원이 상하이자유무역지구를 전방위 개혁의 모델로 키우려 하듯 당시 국무원은 충칭에서 도시·농촌의 공생 모델을 시험하고자 했다.”
추이 교수는 ‘충칭 모델의 신봉자’라는 말이 나올 만큼 충칭 지역에서 실시된 각종 정책을 옹호한다. 그런 그가 충칭 모델에서 보시라이의 그림자를 제거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충칭 모델의 최고 공헌자는 오히려 황치판(黃奇帆) 충칭시장”이라고 설명하면서다. 황 시장은 2001년 상하이 푸둥(浦東)관리위 부주임에서 충칭시 부시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후 충칭 모델과 관련된 정책이 대부분 황 시장의 손을 거쳐 기획되고 추진됐단다.

-충칭 모델은 지속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당연하다. 후커우(戶口·거주 등록) 제도 개혁이 대표적이다. 충칭에선 이미 380만 명의 농민공에게 도시 후커우를 발급해줬다. 충칭에서 일하는 농민공들은 교육·의료·주택 등의 분야에서 기존 주민들과 다르지 않은 대우를 받고 있다. 리커창(李克强) 총리가 내수시장 확대를 위해 추진하는 ‘신형 도시화’ 정책은 후커우 개혁 없이 이뤄질 수 없다. 리 총리는 결국 충칭 모델을 참조할 것이다.”

-충칭 모델에서 배울 게 또 있다면.
“농민들이 이농(離農)할 때 갖고 있던 땅을 처분해 도시생활자금을 만들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충칭이 실시한 게 바로 토지거래(地票) 시장이다. 충칭의 농민들은 유럽에서 탄소배출권을 거래하는 것처럼 이농 후 토지사용권을 거래소에서 팔 수 있다. 게다가 충칭은 전국에서 가장 먼저 공공임대주택 제도를 실시했다. 보시라이가 몰락했다고 해서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중국 지식인 사회에서 신좌파가 본격 부각된 것은 2008년 터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다. 중국 경제가 곤경에 빠지면서 국가 역할을 강조하는 신좌파 학자들의 주장에 힘이 실리게 됐다. ‘국가가 전면에 나서고 민간은 뒤로 빠진다’는 뜻의 국진민퇴(國進民退)는 당시 분위기를 잘 설명해주는 용어였다. 신좌파는 중국 학계에서 비주류에 속한다. 우징롄(吳敬璉) 국무원발전연구중심 연구원, 장웨잉(張維迎) 베이징대 교수 등 우파 지식인들이 학계를 주도해왔다. 이들은 신좌파를 ‘시장 개혁을 뒤로 돌리려는 보수주의자들’이라고 비판한다. 중국에선 요즘 중화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내셔널리즘, 전통을 강조하는 유가(儒家)주의, 마오쩌둥 시대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신(新)마오이즘 등 다양한 사조가 있다.

리커창 개혁 순항 땐 20~30년간 7% 성장
-일각에서 ‘신좌파는 보수주의자’라고 한다.
“1994년 내가 베이징에서 세미나를 한 번 열었는데 당시 영국 잡지 ‘뉴 레프트 리뷰(New left Review)’의 편집장을 초청했다. 이를 두고 기자들이 ‘신좌파(New left)’ 모임이라고 썼다. 그 후 신좌파라는 단어는 ‘자유주의 개혁의 반대편’이라는 뜻으로 남용됐다. 그러나 신좌파를 반(反)개혁 세력으로 보는 데 반대한다. 오히려 나는 국가가 일정 수준으로 국유 재산을 장악하지만 기업소득세 감세 등을 통해 민간기업의 역할을 북돋워주는 ‘자유사회주의(Liberal Socialism)’를 더 신봉한다. 시장 기능을 충분히 살리자는 거다. 실제로 황치판 시장이 이끌던 충칭에서는 기업소득세를 전국 평균의 절반인 15%로 낮추었다. 국유기업 이익으로 재정을 충당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 ‘국가도 나서고 민간도 나서라(國進民也進)’는 방식이다.”

-시장 역할을 강조하는 리커창 총리의 개혁을 어떻게 보나.
“리 총리의 개혁은 단기적으로 경제의 급등락을 막고 중기적으로는 도시화를 통해 시장을 육성하겠다는 거다. 장기적으론 체제 개혁을 통해 성장 동력을 확보하겠다는 거다. 최근 추진한 상하이무역자유지구 설립은 그런 개혁 중 하나다. 적절한 방향이다. 이런 정책들이 잘 추진된다면 중국은 향후 20~30년간 연 7%의 안정 성장을 이룰 수 있다.”

신좌파 지식인인 추이 교수가 우파 성향의 ‘리코노믹스(Likonomics·리커창의 경제정책)’에 대해 후한 평가를 내린 것이다. 중국 지식인 사회의 논쟁은 이처럼 단순한 좌우 대립의 틀을 넘어서고 있다. 새로운 발전 패러다임을 찾기 위한 실용주의적 토론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추이즈위안 칭화대 공공관리학원 원장. 정치경제학과 정치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베이징 출생. 1985년 국방과기대에 들어가 시스템공학·응용수학을 전공했고 95년 미국 시카고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MIT 부교수, 하버드대 방문교수 등으로 일했다.

한우덕 중국연구소장
woodyh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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