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하라 유폐 6년 벤벨라 미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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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아메드·벤벨라 전 알제리 대통령이 6년간의 감옥살이 끝에 석방됐다는, 아니 곧 석방되리라는 설이 떠돌고 있다. 알제리 독립혁명의 맹장 벤벨라가 프랑스의 감옥으로부터 독립 알제리의 수상관저로 개선한지 3년 후, 1965년6월19일 새벽의 고요한 찬 공기를 깨뜨린 탱크부대의 굉음 속에 그이 화려했던 정치행각은 종적을 감추었다.
그로부터 6년, 벤벨라는 한번도 공개 재판을 받아 본적도, 소재가 밝혀지거나 확인된 적도 없이 「사하라」사막을 전전, 거의 완전한 망각과 오리무중 속에 빠져버렸다.
그의 돌연한 석방설을 보도한 베이루트의 「알·키파」 지의 주장은 이내 낭설이라는 반론에 부딪치기는 했어도, 미스터리 물과도 같은 벤벨라의 옥중생활과 탈옥기도와 석방설에 관한 구구한 억측들은 끊임없이 국제정치 야화의 극적인 대목들을 이루어온 게 사실이다.
독립운동기간이나 독립후의 권력다툼에 있어 항상 벤벨라의 오른팔 노릇을 해온 부메디엔 국방상의 모반은 그 당시 무르익고 있었던 아시아-아프리카 수뇌회담의 신 중공성향을 깨뜨리기 위한 소련 측의 조정에 의한 것이라는 설도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강력한 군부의 세력을 견제하려던 벤벨라의 정치적 기도에 군부가 선수를 쳤다는 설이 더 유력하게 나돌았다. 취임 후 벤벨라 대통령은 아프리카의 카스트로를 자처하면서 북아와 블랙·아프리카 국제혁명의 기수로서의 냄새를 풍기면서 국내경제엔 등한시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독재권력을 공고히 쌓기 위해 군부를 끌어들여 아바스 전임 정 수상 등 온건파를 거세하고 하회주의세력전선 등 우파집단의 유혈반란을 초래하는 등 정치적 불안을 양성시켰던 것이다.
심복들의 배신으로 체포된 벤벨라는 즉시 알제이 교외 20㎞되는 곳의 한 병영에 감금되었다.
그 동안 이집트는 벤벨라를 구출하기 위해 3번씩이나 탈옥기도를 했다고 한다.
65년8월 이집트는 특공대원을 알제이 항구에 잠입시켜 구 프랑스 해군 건물에 연금 돼있던 벤벨라를 탈주시키려했으나 벤벨라 자신의 거절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도저히 성공할 가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두 번째는, 그가 감금돼 있다는 차만라세 일대의 유전을 시찰하겠다는 구실로 공중 촬영까지 하고 특공대원들이 그곳 비행장에까지 착륙했으나 역시 경비대한테 발각 돼 이집트로 호송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 벤벨라는 거기에 있지 않고 알제이 근방 메디와 블리다로 잠입시켰다.
그러나 이번에도 하수인들이 체포되는 통에 수포로 돌아갔다.
그후 「타임」지는 언젠가 옥중의 벤벨라에 관한 보도에서 그가 아직도 부메디엔 정권에 굴복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전하기도 했다.
이번 석방설도 『외국으로 나간다면 석방시켜주겠다』는 정부측 조건을 그가 거절함으로써 흥정이 끝나버렸다고도 한다. <유근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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