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제자는 필자>|<제5화>동양극장 시절 (19)|박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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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차홍녀의 죽음
평생을 연극에 바치고 보니 하 많고 긴 이야기를 여기에다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전성기 동양극장의 마지막 얘기와 관련해서 일전에 못 다한 차홍녀 이야기를 다시 꼬집어 내야겠다.
그것은 내가 그 애를 편애했다거나 무슨 딴 미련이 있어서가 아니라 지금의 연극 지도자를 위해서 한마디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이다.
동양극장은 19만5천원의 상업은행 빚으로 세워졌다는 것은 이미 얘기했다. 그런데 주인 홍순언이가 죽은 다음 최상덕이가 워터맨 만년필로 쓴 달필의 소절수가 19만5천원의 한성은행 서대문 지점의 부도로 문을 닫게 되었다. 그러자 채권자가 몰려오고 그 뒤처리를 내가 도맡아 했는데 그 집을 사서 경영하겠다고 일인 두 사람, 한인 한 사람이 나타났다.
이들이 대표자로 김 모라는 젊은 사람을 내세워 단원을 포섭하려 할 때 이들은 「충신부사이군」이 아니라 『우리가 무슨 가구냐, 건물과 함께 팔리게…』이래서 극단「아낭」이라는 것이 조직되었다. 「아낭」이란 밀양 영남 누 아래 대숲에서 정조를 지키려다 죽은 각시의 이름이다. 무슨 충신이거나 정조를 지킨다는 뜻은 아니면서 내가 지은 이름이다. 1939년 가을의 일이다.
여기에 차홍녀가 빠질 수 없었던 것은 물론이다. 제일극장 (현 한일극장) 을 무대로 삼은「아낭」의 창립 공연은 『김옥균』이었다. 이것을 안 동양극장의 새 주인은 약이 올라서 자기들도 『김옥균』을 하겠다고 나섰다.
동양극장과 제일극장의 싸움이다. 나는 전 KNA 사장 신용욱 (원명 신용인) 을 친히 아는 사이라 비행기로 『김옥균』의 공연 「비라」를 하늘에서 뿌렸다. 그랬더니 동양극장에서는「애드벌룬」을 띄웠다. 이렇게 치열한 경쟁을 벌인 결과 「아낭」의 『김옥균』이 우세하여 그것을 가지고 지방 공연을 떠났다. 그래서 함경도 지방 공연에서 돌아오는 길에 철원에서 막을 열었다.
공연 일정을 마치고 보따리를 들고 차를 타러 나오는데 철원 극장과 기차 정거장과는 거리가 멀어서 버스를 타야했다.
그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길가에서 거적을 쓰고 신음하는 걸인이 있었다. 누구하나 거들떠보지도 않는데 차홍녀는 그 앞으로 가서 그 거적을 들추고 돈 1원을 주었다. 그 때 1원은 큰돈이다.
차홍녀는 제 자신이 가슴 병으로 쓰러진 적이 자주 있어서 내 속 깨나 태웠으며 나는 온갖 귀한 약, 구하기 어려운 약을 구해 다 먹였다. 내 부모에게 그랬으면 출천 대효가 되었을 것인데… 하나 홍녀는 그 길로 집에 돌아와서 이내 지독한 천연두로 눕게 되었다. 동정심이 많은 홍녀가 그때 철원에서 거적을 들추어보고 돈 1원을 준 그 걸인이 바로 천연두 환자였기 때문에 거기서 감염이 된 것이다.
내가 그 기별을 듣고 마포 도화동 그녀의 집에 갔을 때는 그 부모와 식구가 그 방에 들어가는 것을 금했다.
그러나 장지 밖에서 그 부가 『홍녀야 선생님 오셨다』하니까 울음소리로 『선생님』하고 외치는데 그냥 듣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말리는 사람의 손길을 뿌리치고 뛰어 들어가 보니 차마 볼 수 없는 형상이었다. 눈은 뜨지도 못하면서 눈물이 흘렀고 『선생님, 빨리 나가세요」하고 손짓을 했다. 나는 너무나 불쌍하고 애처로 와서 그냥 덤썩 끌어안고 『홍녀야-』하고 울었다. 그런지 며칠 후 홍녀는 저 세상 사람이 되고 말았으나 나는 오늘까지 살아서 이 글을 쓰고 있다.
나는 지금 차홍녀가 못 잊혀서 이렇게 뇌까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오늘까지 많은 배우 (연기자)를 키웠다. 그러나 차홍녀 만큼 정성을 다해 지도한 적은 없다. 나는 늘 그에게 이런 서양의 연극 선구자의 말을 들려주었다.
『연극하는 인간에게 신과 같은 절대의 진·선·미를 요구할 바 아니다. 그러나 연극은 가장 인간다운 예능이다. 연극하는 인간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것이다. 거기에 신과 통하는 길이 있다. 인간이 인간답게 연극하는 모습은 가장 신답다고 하겠다.』
홍녀는 천연두 환자에게 인간다운 동정을 했다가 감염이 되어 제 목숨을 잃었고, 나 또한 인간다운 정리에서 그녀를 끌어안고 얼굴과 몸을 어루만졌 것만 나는 아무 탈이 없다. 이는 곧 앞서 말한 것처럼 연극의 신이 나에게 신과 통하는 길을 열어준 것이라 생각한다. 어쨌든 오늘날 연극하는 사람들에게서는 흔히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인간적」인 면이 그때 우리들에게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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