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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기의 글로벌 포커스] 독일 경제의 ‘승승장구’ 비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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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3호 20면

선거를 좌우하는 건 역시 경제다. 9월 독일 총선에서 앙겔라 메르켈(59) 총리가 이끄는 기독민주·기독사회당 연합이 압승을 거둔 것도 잘나가는 경제 덕분이었다. 2005년 총리가 된 메르켈은 앞으로 4년 임기를 채우면 12년 장기 집권의 기록을 세우게 된다.

요즘 독일 경제는 그야말로 탄탄대로다. 선진국과 신흥국을 망라해 세계의 부러움을 한몸에 받고 있다. 무엇보다 일자리가 넘쳐난다. 실업률이 5.2%까지 떨어졌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취업이 가능할 정도다. 특히 청년 실업률은 7%로 선진국 최저 수준이다. 고용률은 73%에 달한다. 경상수지 흑자가 계속 불어나고 재정도 안정돼 있다.

하지만 10년 전까지만 해도 얘기는 달랐다. ‘유럽의 병자’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제로 성장에 실업률이 11%에 달했다. 갑작스러운 통일의 후유증에다 과잉 복지와 노동시장의 경직성으로 경쟁력이 계속 추락했다.

메르켈의 약진, ‘슈뢰더 개혁’이 바탕
독일 경제가 수렁에서 빠져나오는 발판을 마련한 것은 바로 사회민주당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였다. 메르켈 총리의 우파 정권이 아니었다. 중도 좌파로 ‘제3의 길’을 표방한 슈뢰더는 “뼈를 깎는 개혁 없이는 ‘독일병’을 치유할 수 없다”고 역설했다. 그가 들고나온 경제 개혁안이 ‘어젠다 2010’이었다. 노동시장의 유연성 확보와 복지제도의 수술, 규제 철폐, 관료주의 타파, 창업 장려 인센티브, 법인세 인하 등이 골자였다.

자신의 지지기반이었던 노조와 좌파가 거세게 반발했지만 슈뢰더는 개혁안을 밀어붙여 2003년 연방 상·하원을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슈뢰더는 지지세력의 분열로 2005년 총선에서 패하고 말았다.

일러스트 강일구

정권을 넘겨받은 메르켈 총리는 개혁의 싹을 소중히 키웠다.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데 힘을 배가했다. 기업들은 투자를 다시 늘렸고 전후 ‘라인강의 기적’을 일궜던 독일 제조업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유로화 도입에 따른 유럽 경제 통합의 확대는 수출 제조업에 날개를 달아줬다.

독일 경제 부활의 견인차는 중소·중견기업들이었다. 오늘날 독일의 중소기업은 전체 기업의 99%를 차지하며 71%의 고용을 떠맡고 있다. 전체 산업 매출의 50%를 점하면서 법인세의 55%를 낸다. 그만큼 수익성이 탄탄하다는 얘기다.

‘히든 챔피언’이라 불리는 중견기업들의 활약도 독보적이다. 히든 챔피언은 ^매출액이 40억 달러(약 4조원) 이하면서 ^자기 분야 세계 시장 점유율이 1~3위 ^수출 비중은 50%를 넘는 기업을 말한다. 독일의 히든 챔피언 수는 현재 1300여 개로 미국(약 400개)이나 일본(약 200개)을 압도한다. 한국은 30개도 안 된다.

독일의 제조업은 대기업과 중소·중견기업들이 탄탄한 상생의 협력 사슬을 형성하고 있다. 원자재 가공에서 중간 소재·부품, 완제품까지 완결된 산업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다. 아웃소싱이나 해외 현지생산의 비중은 크지 않다. 일자리를 온전히 지켜나가는 비결이다.

협력적 노사관계는 독일 경제의 또 다른 힘이다. 슈뢰더의 노동시장 개혁으로 정리해고의 범위가 넓어지고 기간제 노동계약이 가능해졌지만 노사 갈등은 오히려 줄었다. 독일의 전통인 일자리 공유시스템과 노사 간 공동 의사결정 시스템은 허물어지지 않았다. 기업들은 기간제 노동자를 쓰더라도 동일 노동에 대해선 정규직과 차별 없이 동일 임금을 적용한다.

기업 하기 좋은 환경 만들기에 주력
독일의 기업들은 불황이 와도 가급적이면 모든 직원을 품고 근무시간을 함께 줄여나가는 방식으로 일자리를 지켜나간다. 독일에선 일류 대학 졸업생들도 굳이 대기업을 선호하지 않는다. 고용의 안정성과 삶의 질, 자기 성장에 있어 중소·중견기업이 결코 뒤지지 않기 때문이다.

독일에는 산·학·연 연계 시스템이 잘 짜여 있다. 정부는 다양한 산업지원 정책을 구사하지만 중소기업이라고 무조건 세금을 깎아주거나 대출 보증을 서주지는 않는다. 연구개발(R&D) 지원과 기술인력 양성 등에 예산을 집중 투입한다.

금융기관들도 큰 역할을 한다. 중소·중견기업을 중점 지원하는 독일재건은행(KfW)이 대표적이다. 이 은행은 대출할 때 담보나 보증을 요구하지 않는다. 아이디어와 기술력을 보고 돈을 대준 뒤로는 일상 경영까지 컨설팅하는 동반자 관계를 맺는다.

독일은 여러모로 한국 경제에 롤모델감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창조경제 구상이 독일을 염두에 둔 것이란 해석도 나온다. 박 대통령은 메르켈 총리와 10여 년 전부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하지만 한국의 창조경제는 지금 길을 잃은 형국이다. 여전한 규제와 복지 포퓰리즘, 정규직 노조의 철옹성 앞에 좌절한 기업들은 생산기지를 자꾸 해외로 돌리고 있다. 독일 경제 부활의 과정을 냉정히 돌아봐야 할 때다. 고통스러운 개혁과 타협이 가져다준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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