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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지식] 당신의 모든 걸 대신합니다 … 섬뜩한 아바타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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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나를 빌려드립니다
앨리 러셀 혹실드 지음
류현 옮김, 이매진
432쪽, 2만원

내가 자주 들르는 강원도 산골 마을에는 수십 년 세월을 지켜온 농가가 십여 채 있다. 낡고 초라한 집들인데 하나같이 단아하고 정겨운 인상을 풍긴다. 농기구와 건초, 갓 수확한 고추와 채소들이 마당에 어지럽게 놓여 있어도 도시의 고물상 같다는 생각이 든 적은 없다. 왜 그럴까. 모두 집주인의 손길, 그 노동의 흔적이 배여 있기 때문 일거다. 자신의 직접노동으로 구축한 세계는 아름답다. 어쩌다 우연히 펜으로 꾹꾹 눌러 썼던 학창시절 연애편지를 발견했을 때 그 전율을 기억하는가. 긴 밤 지샌 연정을 들키지 않으려 애쓴 흔적이 역력한 그 유치한 문장의 육감을 말이다. 자신의 노동으로 생활세계를 건조하고, 강박증에 일이 엉켜도 자신의 감정을 자체 관리했던 시대는 아름답다.

 그런데 ‘아웃소싱자본주의’로 명명할 수 있는 요즘의 시장지상주의에서 외주(外注)로 구입한 나는 진정 ‘나’일까? 『감정노동』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미국의 사회학자 앨리 혹실드가 넌지시 묻는 질문이 이것이다. 미국인들은, 아니 잘사는 나라의 현대인들은, 사생활의 깊숙한 곳까지 그 매혹의 손길을 뻗은 서비스산업에 사적 욕망과 인생의 미묘한 번민을 해결해 줄 것을 의뢰하기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가령, 애인이나 배우자를 찾는 일을 돕는 ‘러브 코치’가 각광을 받고, 결혼중개 인터넷사이트(매칭닷컴)가 호황을 누린다. 심지어는 결혼생활의 만족도를 높여주는 사이트(이하모니)에도 무려 2000만 명의 유료회원이 가입했다. 남녀간 불꽃(sparking)이 얼마나 튀고 지속될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검사 기구를 개발해 ‘권태기없는 커플’의 가능성을 열었다.

『감정노동』『나를 빌려드립니다』의 저자 앨리 러셀 혹실드.

 사적 욕망 해결을 위한 서비스의 확대는 한 세대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직업군을 낳았다. 웨딩 플래너와 상담치료사는 이제 낯선 직종이 아니고, 하우스 매니저, 말동무 요양사, 베이비플래너, 애니메이터(일종의 파티 플래너) 등 감정돌봄을 파는 직종이 넘쳐난다. 대리모는 자궁을 임대하여 후진국 여성들이 돈을 벌 수 있는 직종이고, 임대남편, 임대아내, 심지어는 임대친구업도 출현했다. 우정을 임대할 수 있는가? 페이스북에 절친이 수백 명이 있는데도 미국인들은 마음이 맞고 언제나 터놓고 상의할 수 있는 친구를 원한다. 없으면 친구됨의 조건을 상세하게 걸고 인터넷에서 구매할 수도 있다. 일찍이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인간의 감정을 백여 가지도 넘게 열거했는데, 그 다양한 유형을 스마트폰이 이모티콘으로 상징화했다는 것은 흥미롭다. 모두 상품화할 수 있는 대상이다.

 아무튼 20세기 자본주의는 초기에 생필품과 사치품을 제조해 시장에 내놨고, 후기에는 서비스를 팔았다. 현재는 사적 욕구를 해결하고 감정을 충족시킬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상품화했는데, 욕구가 다양해질수록 사생활을 외주하는 아웃소싱자본주의는 더욱 확장될 것이라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면서도 한편 섬뜩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것은 시장의 편리함과 맞바꾼 인간성 파괴에 대한 공포 때문이다. 원토로지스트(wantologist)라는 신직종 앞에서는 망연자실해진다. 자신이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분간해주는 전문가가 원토로지스트인데, 헷갈리는 사람들이 즐겨 찾고 만족할 만한 해답을 얻는다. 해답은 얻었으나 그것이 도덕적인지, 정의로운지가 또 헷갈린다. 아니 ‘사회적 정의’에 관한 질문 자체가 제기되지 않는 것이 문제다. 여기에 ‘자신을 외주하라고 속삭이는 시장’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아웃소싱자본주의는 지극히 사적인 것들과 매매대상이 아닌 것들, 마이클 샌델식으로 말하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구매하기를 독려하는데, 판매자, 구매자, 브로커 모두 그것이 판매 혹은 임대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도덕적 판단이 흐려진다는 점이 심각하다. 장기판매는 이미 익숙한 현상이고, 최근 중국에서는 아기 판매업자가 등장했다. 시장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무차별적으로 상품화한다.

 저자가 『감정노동』에서 이미 지적했듯, 감정과 정서를 사고파는 것은 도덕적인가? 답하기 애매한 현상들이 속속 늘어났다. 대리모가 제공하는 자궁 임대는 비윤리적이다. 그러나 불임부부의 절박한 갈망을 해결한다. 장례대행사는 ‘애도’를 팔고, 보모는 아기에 대한 ‘사랑’을 팔고, 부부싸움이 심한 가정의 가사도우미는 ‘인내심’을 판다. 적어도 노동하는 동안만은 감정노동자의 인격은 억제된다. 인격이 소멸된 감정노동자를 저자는 ‘투명인간’이라고 부른다. 슬픈 광경이다. 매칭닷컴처럼 배우자의 선택 폭을 늘려도 50%에 달하는 미국의 이혼율이 줄지 않는다. 현재 미국에서 6쌍 중 1쌍은 결혼중개 사이트로 만난 부부인데 깨지는 신혼도 고공행진을 멈추지 않는다. 가족구성이 선택지의 폭이 아닌 다른 요인으로 좌우된다는 증거다.

 현대인은 완벽한 욕망의 아바타를 기꺼이 구입하느라 돈을 벌고 쓴다. 사생활 깊이 물들인 시장의 유혹과 대적하기란 쉽지 않지만 그것을 구입해도 되는 것인지를 한번쯤은 되짚어보라는 것이 저자의 완곡한 사회학적 권유다. 그렇지 않으면 공동체적 미덕의 붕괴를 막을 수 없다. 넘실거리는 시장도 범접할 수 없는, 진정한 자기와 만나는 통로를 간수해야 한다. 그래서 이런 질문이 필요하다. 사생활과 감성을 외주로 구매한 나는 진정한 나일까?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송호근  서울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정치와 경제, 사회를 넘나들며 글을 써왔다. 저서 『인민의 탄생』(2011) 『이분법 사회를 넘어서』(2012) 『그들은 소리내 울지 않는다』(2013)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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