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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지식] 미인은 무죄 … '경국지색'은 남자들의 변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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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홍안화수
천 화·리스야 지음
심규호 옮김, 중앙북스
448쪽, 2만원

장이머우(張藝謨) 감독의 영화 ‘연인’의 도입부. 맹인을 가장한 장쯔이(章子怡)의 춤사위가 현란하다. 흐르는 노래는 ‘가인곡(佳人曲)’. “북방에 아리따운 여인 있어, 세상에 견줄 이 없이 홀로 우뚝하네. 한 번 돌아보면 성이 위태롭고, 두 번 돌아보면 나라가 기운다네.” 카네시로 타케시(金城茂)가 이어 부른다. “성이 위태롭고 나라가 기우는 것을 어찌 모르겠소만, 아리따운 여인을 다시 얻기는 어렵다네.”

 한무제(漢武帝) 때 이연년(李延年)이 지은 노래다. 경국지색(傾國之色)란 말이 여기서 비롯됐다. 영화 ‘연인’도 류더화(劉德華)까지 가세해 절세미녀에 얽힌 삼각관계로 파국을 맞는다. 결국 미녀는 비극의 씨앗인가.

 중국의 4대 미녀는 ‘침어낙안(沈魚落雁), 폐월수화(閉月羞花)’로 일컫는다. 호수에 얼굴을 비추니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것을 잊고 가라앉았다는 서시(西施), 하늘을 보자 기러기가 날갯짓을 잊어 떨어졌다는 왕소군(王昭君), 보름달도 구름 뒤로 숨는다는 초선(貂蟬), 모란꽃도 부끄러워 고개를 숙인다는 양귀비(楊貴妃)다.

중국 푸단대 천 화 교수는 ‘홍안화수’(紅顔禍水)이라는 말에는 망국의 책임을 미녀에게 돌린 비겁한 남자들의 심리가 반영돼 있다고 말한다. 중국 화가 샤오 위티엔(68)이 그린 양귀비. [사진 중앙포토]

 절세가인이 이들뿐이랴. 이백(李白)이 『청평조사(淸平調詞)』로 양귀비의 질투심을 자극한 조비연(趙飛燕), 두목(杜牧)이 떨어지는 꽃에 비유한 녹주(綠珠), 임금과 신하들이 동시에 사랑한 하희(夏姬)는 어떤가. 그런데 역사는 이들을 짐짓 ‘홍안화수(紅顔禍水)’로 칭한다. ‘홍안’은 뛰어난 미모를, ‘화수’는 재앙의 근원을 뜻한다. 남자를 미혹시켜 재앙을 부르는 미인, 곧 경국지색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게 무슨 죄인가. 가시에 찔렸다고 장미를 탓할 수 있나. 천화(陳建華) 홍콩과기대 교수는 저서 『홍안화수』를 통해 절세미녀 15명을 소개하며, 이들에게 덧씌워진 왜곡된 이미지를 한 겹씩 벗겨낸다. 예컨대 경국지색의 원조인 하(夏)의 말희를 보자. 본디 재색을 겸비한 요조숙녀였으나 호색한 걸왕(傑王)에게 바쳐지는 신세가 된다. 이후 잔혹한 궁중암투에서 살아남는 과정에 악녀로 변했다는 것이다. 낮 없는 장야궁(長夜宮)과 주지육림(酒池肉林)으로 피폐해진 하(夏)왕조의 멸망이 어디 그녀만의 책임이겠나. 어디까지나 왕인 걸(傑) 자신의 책임 아니겠나. 설령 말희가 썩어빠진 하(夏)를 무너뜨리고 건실한 상(商)이 들어서는데 일조했다면, 이를 재앙이라고 할 수 있는가.

상(商)의 주왕(紂王)에게 헌상된 달기도 그렇다. 구미호의 화신으로, 포락형의 악녀로 묘사된다. 그러나 『사기(史記)』에만 언급이 보이며, 여타 역사서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오히려 『상서 (尙書)』는 주왕의 여섯 가지 죄목을 들며 혼군(昏君)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악독한 형벌은 당시에 이미 보편적이었고, ‘주지육림’도 향락을 상징하는 표현일 뿐이란다.

 즉, 미인이 재앙을 부른다는 말은 ‘헛소리’란다. 미인은 무죄다. 군주들의 몰락과 죽음은 남자들 사이 욕망의 충돌, 기만과 배반, 모욕과 반항이 가져온 결과였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책의 부제도 ‘미녀를 탐한 남자들의 종말’이다. ‘경성경국지색(傾城傾國之色)’은 실패를 인정하지 못하는 남자들의 변명이자 남성패권주의의 발로라는 것이다.

 저자는 각종 역사서와 소설, 시문을 훑어가며 절세미녀들의 굴곡진 삶을 재조명한다. 죽어서도 한무제에 아름다운 인상을 남기려 수척한 얼굴을 끝내 보이지 않았던 이부인(李夫人), 목을 치려던 망나니들이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대신 죽겠다고 했다는 달기, 미소 한번 보기 위해 봉화를 올렸다지만 웃음을 잃은 삶을 살아온 포사, 국가간 전쟁까지 초래한 하희(夏姬)…. 남자들의 소유물로, 역사의 제물로, 선택권이 없었던 미녀들의 박복(?)한 인생역정을 다각도로 짚는다.

 절세가인 열전이랄까. 때론 사랑을 위해, 조국을 위해, 그저 살아남기 위해 역사의 굽이에서 온몸으로 부대끼다 스러진 미녀들에게 아름다움이란 과연 무슨 의미였을까.

박종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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