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벤처는 달려야 한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벤처업계의 기린아 오상수 새롬기술 사장이 허망하게 몰락했다. 한때 새롬기술은 삼성전자의 주가보다 높았고, 오사장은 이건희 삼성 회장 다음 가는 재산가로 벤처업계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분식회계, 지분율 허위 공시 등의 혐의로 지난 11월21일 검찰에 구속됐다. 무리한 사업확장과 비리가 몰락의 원인이었다.

벤처 1세대가 무너진 때문인지 서울 테헤란밸리는 한층 더 어두워 보인다. 인재들을 벤처업계로 불러모은 코스닥시장의 활황은 이미 불꺼진 아궁이처럼 싸늘하기만 하다. 언제 코스닥지수가 3백선을 넘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다. 안정된 대기업을 버리고 벤처로 향했던 젊은 직장인들은 연어처럼 다시 대기업으로 복귀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벤처업계의 몰락에서 비롯되고 있다.

2∼3년 전 벤처붐이 불었을 당시 커다란 성공의 희망을 품고 대기업을 떠나 벤처기업으로 자리를 옮긴 직장인 4명을 만나보았다. 이들은 예전의 선택을 후회하고 있을까. 지난 3년 동안 이들은 벤처업계의 부침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이들에게 벤처업계의 미래는 어떻게 비춰지고 있을까.

원일성 스마트카드테크놀로지 상무는 지난 99년 삼성물산 과장으로 근무하다가 게임업체인 배틀탑 부사장으로 전격 영입됐다.

비록 중소규모의 벤처업체였지만 과장에서 부사장으로 몇 계단을 점프한 것은 그에게 신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정작 10여년 동안 근무한 대기업을 떠난 이유는 97년 연말 보너스가 2백% 삭감됐기 때문이었다. 당시 주택 대출자금을 상환해야 하는 처지의 그에게 보너스 삭감은 심각한 불안감을 던져주었다. 겨우 대출금은 상환했지만 언제 해고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그는 월급쟁이에 대해 회의감이 들었다.

원상무는 같은 계열사에서 근무하는 친구들 세 명을 모아 본격적으로 창업 아이템을 찾기 시작했다. 황소개구리 양식 등 다양한 창업 아이템을 내놓으며 1년6개월이나 토론했지만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침 게임배급사인 배틀탑 사장으로 있던 친구의 제안을 받아들여 배틀탑 부사장직을 맡게 됐다.

99년 당시 배틀탑은 전국의 PC방을 대상으로 온라인게임 랭킹사업을 벌였다. 인기 있는 게임에서 전국 게이머들의 순위를 매기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사업이었다.

게이머들이 모여 한판 실력을 겨루는 한국게임리그를 개최하기도 했다. 당시 게임 열풍이 불면서 배틀탑의 회원수는 65만명으로 불어났고 매출액은 99년 18억원에서 2000년엔 35억원으로 증가했다. 이에 힘을 얻은 원상무는 2000년 세계 게이머들을 상대로 리그를 펼치는 아이디어를 내게 됐다.

이를 위해 그는 일본과 미국에 해외법인 설립을 주도했다.대회는 열렸으나 여기에 쏟아부은 돈으로 회사가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확고한 수익모델 없이 덜컥 해외법인을 설립한 것도 부담으로 돌아왔다.

결국 배틀탑은 지난 5월 사업을 정리했다. 원상무도 일본 지사장을 끝으로 귀국해야 했다. 일자리를 찾기 위해 대기업 면접도 봤지만 도저히 대기업으로 되돌아갈 수 없었다. 뼈저린 패배감을 맛봤지만 배틀탑에서 쌓은 경험을 버리기엔 너무 아까웠다. 경영자로 일하면서 의사결정 과정에 직접 참여하고, 조직을 관리한 노하우를 썩일 수는 없었다.

마침 친구의 도움으로 스마트카드 개발업체인 스마트카드테크놀로지에 상무로 영입되는 기회를 잡았다. 98년 설립돼 현재 직원수가 20명에 불과한 작은 업체지만 그의 꿈은 야무지다. 작지만 망하지 않는 회사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원상무는 “파산한 벤처들의 유·무형 자산이 폐기처분되는 현실이 안타깝다”며 “비록 첫 사업은 실패했지만 실패한 경험을 바탕으로 성공한 회사를 일구고 싶다”고 말했다.

지난 99년 말 삼성물산에 근무하던 강성복 진인소프트 사장은 서랍속에 넣어둔 사표를 던졌다. 95년 1월 입사해 5년 동안 회계팀에서 일했지만 자신이 꿈꾸던 직장생활과는 거리가 있었다.

서울대 영문과 석사를 졸업한 문학도가 빡빡한 숫자를 다루려니 우선 일이 재미없었다. 매일같이 계속되는 야근과 술자리로 하루 5시간밖에 눈을 못 붙이는 날도 수두룩했다. 자기 시간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이 제일 견디기 힘들었다. 결국 강사장은 다니던 회사를 박차고 나왔다.

그러나 막상 그를 맞이한 것은 방황이었다. 삼성물산에서 나온 뒤 자신에게 맞는 직장을 찾지 못해 1년 동안 벤처기업 두 곳을 옮겨다녔다. 마침내 몸담은 곳이 진인소프트. 강사장은 대기업에서 근무할 때 익힌 회계 지식을 인정받아 재정담당 이사로 영입됐던 것. 지난해 그는 마케팅까지 관리하는 공동 대표이사로 승진했다.

진인소프트가 곧 시장에 내놓는 온라인게임 ‘파르티타’(2003년 출시예정)의 개발 뒤에는 강사장의 숨은 공로가 있었다.

그가 게임 개발에 필요한 자금 40억원중 20억원을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아직 출시되지 않았지만 최근 문화관광부와 한국게임산업개발원이 주관하는 우수게임 사전제작지원 대상에서 장려상을 받았다. 지난 10월에는 삼성전자가 10억원의 개발지원금을 약속하기도 했다. 돈줄이 마른 벤처업계로선 보기 드문 투자유치 사례다.

강사장에게는 매일 퇴근 후 정해진 일과가 있다. 회사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어린이집에 가서 세살된 딸 지유를 찾아오는 것이다. 둘째가 태어난 지 한달밖에 안돼 큰아이를 돌보는 일은 강사장이 전담한다.

신제품 출시가 다가옴에 따라 신경쓸 일이 많지만 벤처에서는 자기 시간을 스스로 알아서 활용할 수 있다. 대기업에 있었다면 딸을 돌보는 것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벤처 사장이 되고 보니 사업가들을 존경하게 됐다. 나 자신도 사업 전반에 대한 고민의 강도와 범위가 평사원 때와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김성호 한국인터넷기업협회 기획실장은 ‘인생을 즐기며 살자’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89년부터 포스코에서 일하면서 그는 언제부터인지 “반복된 일상과 단절하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 결국 그는 2000년 5월, 10년8개월 동안 일한 포스코를 그만두고 한국인터넷기업협회로 옮겼다.

새 직장으로 옮긴 뒤 그가 가장 먼저 실천한 일은 포스코 재직 시절 사내커플로 맺어진 부인과 2주에 한 번씩 영화를 보고 포장마차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것이었다. 최근 부인도 피아노 한 대를 들여놓으며 ‘낭만적인’ 남편과 장단을 맞췄다. 대학 시절 클래식 기타 동아리에서 활동했던 김실장과 함께 피아노 협연을 하기 위해서다.

김실장이 한국인터넷기업협회에 투신하게 됐을 때는 벤처 열기가 서서히 식을 무렵이었다. 설립 당시에는 회원 벤처사가 12개에 불과했다. 김실장은 거의 매일 테헤란밸리를 돌며 벤처사들을 설득했지만 소득이 없었다.

그러다가 벤처업계에 본격적인 불황이 닥치자 벤처사들끼리 난관을 타개하자고 뭉치게 됐다. 매월 평균 가입사 수가 25개나 됐다. 벤처업계의 악재가 인터넷기업협회에는 호재로 작용한 것. 현재 회원사 수는 4백개를 넘어섰다.

인터넷기업협회의 목표는 IT벤처의 전경련이 되는 것이다. 인터넷기업협회는 정직원이 15명으로 IT벤처의 사업 활성화를 위해 외국의 벤처 자본가와 국내 최고경영자(CEO)의 만남을 주선하고 정기 모임과 투자박람회를 개최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한다.

김실장은 협회 일이 예상대로 잘 진행되면 뛸 듯이 기쁘다가 문제가 생기면 몹시 불안해진다. 그만큼 업계의 부침이 심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포스코에서 근무했던 시절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그래도 후회하지는 않는다. “지금 벤처는 양적인 성장을 멈추고 질적으로 한 단계 도약하는 때다. 탈권위적이고 효율적이며 창의적이라는 점에서 벤처의 성장은 계속돼야 한다.”

박근우 안철수연구소 홍보팀장은 요즘 오후 9∼10시가 돼서야 퇴근한다. 그래도 마음은 가뿐하다. 이제야 자신이 회사에 기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LG전자 홍보팀에 근무할 때는 오후 6시에 정시 퇴근했지만 마음 한켠은 늘 허전했다.

최근 그는 ‘아시아 안티바이러스 컨퍼런스’를 기획부터 섭외, 진행까지 혼자 힘으로 치러냈다. 이 컨퍼런스에는 세계 각국의 컴퓨터 바이러스 전문가들이 참여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성취감과 자신감을 갖게 됐다. 자신이 일개 부속품이 아니라 능동적인 한 주체로 인정받게 됐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IMF 직후 벤처붐이 한창일 때 박팀장은 벤처로의 이직 제안을 거절했다.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유행에 휩쓸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당시 언론에서는 벤처의 성공사례만 부각됐지만 박팀장은 벤처의 위험성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는 존경받는 CEO가 있고, 조직이 건강하며, 직장동료들의 가치관이 건전하다는 것이 확인돼야 직장을 옮기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경기불황과 일부 벤처의 비리로 벤처 전반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던 2002년 1월 돌연 안철수연구소로 옮겼다. 이때가 오히려 호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벤처는 말 그대로 위험을 무릅쓰면서 계속 생기고 사라지는 생물체다. 붐은 꺼졌지만 창업여건은 훨씬 좋아졌다”고 말했다.

오상수 사장은 구속 직전 이렇게 말했다. “새롬기술의 미래를 제가 직접 보여드리지는 못했지만 저는 새롬기술이 현재도 엄청난 가능성을 지닌 우량기업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경영자가 비전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대기업이라는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새로운 도전을 택한 벤처 2세대들은 테헤란밸리에서 벤처 1세대가 못다 이룬 꿈을 향해 달리고 있다.

출처:뉴스위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