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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제자는 필자|제4화 명월관(20)-대전 중엔 권번도 하나로 통합 일부기생들 정신대로 끌려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따지고 보면 누구나 자기 손으로 제 무덤을 파고 그 자리에 묻힌다고 할 수 있겠다.
죽은 다음 무덤에 어떤 사람들이 찾아보고 무슨 비석이 세워지느냐는 것도 묻힌 사람의 생전 행로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니 사후무덤관리까지 제 손으로 하는 셈이다.
일본사람들은 1941년 「하와이」진주만을 기습하고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제 무덤을 파기 시작했다.
전쟁이 일어나고 전장이 점점 넓어짐에 따라 지원병, 학도지원병, 징용 등으로 남자들은 전쟁터로 모두 끌려나갔고, 고무·설탕·쇠고기·쌀 등 생활 필수품이 달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판국에 명월관등 장안의 요릿집에 그전처럼 흥청거릴 수는 없게된 것이다. 문은 열었으되 찾는이 없고 손님이 설사 온다해도 차려내 올 음식이 없었다.
이 무렵 네 곳에 있던 권번을 하나로 묶으라는 지시가 내려 대동권번이 생기고 지금 서울 종로구 낙원동에 자리잡게 되었다. 얼마 안돼 기생이라는 이름이 전시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하여 접대부라 이름마저 바뀌었다.
기생들의 옷은 어느덧 화려했던 비단옷대신 「몸빼」라는 일본식 롱바지가 걸치게 되었고, 점심때쯤엔 명월관에서 점심을 나르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밤1시나 2시쯤 휘영청 달 밝은 밤에 거문고를 비껴 들고 인력거위에 앉아 집으로 돌아가던 한 폭의 그림 같았던 기생모습은 그림자조차 없이 사라지고만 것이다.
피에 굶주린 왜놈들은 이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기진맥진한 일본군의 사기를 높인다는 명목으로 대동권번의 기생들을 동원하기에 이른 것이다. 끌려간 기생들이 할 일이란 전선에서 군인들에게 몸을 바치는 일이었으니 다른 말로 정신대역할을 한 셈이다. 미리 낌새를 채고 폐업한 기생들은 이런 곤욕을 면했으나 걸려든 기생들은 참지 못할 처지에 이르렀다하니 이 얼마나 비인간적인 발악인가.
이러고도 전쟁에 이긴다면 이 세상에 선악이 어떻게 구별될 수 있겠느냐는 세상 사람들의 입김 때문에도 일본은 망해야 당연했다.
1945년 8월15일, 일본이 두손들고, 삼천리강토가 해방의 기쁨에 젖자 명월관도 다시 문을 열고 흩어졌던 기생들도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기생이 살아 나타나는가 하면, 만주벌판에서 참혹하게 죽어간 다른 기생들의 소식도 간간이 들려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인생무상을 되씹게 했다.
어떻든 다시 문을 연 명월관에는 미군 새 손님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지금 서울대문리대에 있던 미제5공군 장병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이들은 그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해 야윈 기생들이였건만 치마 저고리를 입은 기생들의 우아한 몸맵시에 「원더풀」을 연발하기만 했다.
미국사람들이 많이 드나들게되자 명월관 기생에게도 새로운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해방되기 전에도 요릿집에 「댄스」라는 바람이 불어 춤이 유행되기 시작했지만 이때는 요릿상을 옆에 놓고 측음기를 틀면서「트로트」나 「포크·댄스」정도 추는 것이 고객이었다. 미군이 들어오자 요릿상은 다리가 높아져 「파티」형식으로 바뀌었고 손님 한사람에 기생한사람씩 붙어 오순도순 서서 이야기하는 새 풍습이 도입된 것이다.
명월관에 드나드는 기생들은 몇 마디정도의 영어를 익힐 필요가 있었고 춤은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 명월관은 주인 이종구씨의 손을 떠나 종업원들이 공동으로 경영하고 있었다. 이종구씨가 명월관 영업권을 내놓게 된데는 한 가닥 사연이 있었다. 친일파로 동경에서 중의원 의원이 된 박춘금이 명월관을 손에 넣고 서울 인사들의 정보를 탐지하기 위해 총독부를 업고 강제로 빼앗았던 것이다. 이종구씨는 명월관 땅과 집만 갖고 영업권을 내놓았기 때문에 해방 후 종업원들의 공동관리가 된 것이다. 그러나 1950년 6월25일 북괴가 남침을 개시함으로써 명월관은 마지막 시련을 겪게되었다.
서울에 들어온 북괴는 명월관에 종로일대를 관할하는 사무소를 설치하고 양민을 괴롭히는 등 갖가지 만행을 자행하다 북으로 도망갈 때 명월관 주인 이종구씨를 납북해갔고 명월관에는 불을 질렀다.
구 한말부터 해방, 그리고 6·25를 거쳐 거의 반세기동안 각계각층의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던 명월관은 이렇게 하여 한 무더기 잿더미로 변해버리고 그후 지금까지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젊은이들에게는 이름만 전해오고 있다.
대지9백90여 평이었던 명월관 자리 중 4백 평 위에는 지금 「피카다리」극장이 들어서고 나머지는 공터로 남아 허구한 일화와 명월관 이름은 한낱 흘러간 옛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계속> 【이난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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