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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증언<(125)|낙동강 공방전(7)|동부전선(4)|「6·25」20주…3천 여의 증인회견·내외자료로 엮은 「다큐멘터리」한국전쟁3년|육본, 분대장에도 처형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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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동부전선의 안강·기계전투도 낙동강 교두보의 운명을 판가름하는 혈전의 하나였다. 북괴군 제12사단과 제766유격연대는 8월 공세가 개시되자, 단숨에 비학산을 돌파, 11일에는 포항에 진입하여 동부전선에 큰 위기를 가져왔다. 「워커」사령부는 의성정면에서 전용한 수도사단에 한국군17연대를 배속시켜 포항남측지구에 침입한 적을 저지하는 동시, 14일에는 포항지대(한미 혼성부대)와 민기식 부대를 병렬시켜 반격했다.
이 작전은 성공하여 안강리 부근에서 반격한 수도사단은 기계동서 선에 진출하고 민기식 부대는 포항을 탈환, 다시 흥해까지 북상하여 동부전선의 제1차 위기는 사라졌다. 적 프로진술에 의하면 북괴12사단과 제766유격연대는 17일 저녁부터 후퇴를 시작하여 19일께에 비학산(높이 766m) 주변에 집결, 재편성했는데 사단병력이 1천5백명 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에 제766유격연대를 해체하여 12사단에 편입, 별도로 2천명의 병력보충을 받아 겨우 5천 병력을 확보하였다는 것이 기록에 나타나있다. 「로이·애플먼」저 미육전사 『낙동강부터 압록강까지』(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를 보면 동부전선에서의 적8월 공세 패인으로서 ①산악지대에서의 야간행군과 공습의 피해로 인한 피로의 누적 ②포병 등 중장비의 부족 ③식량의 결핍 등을 들고 있다.
이중에서도 특히 식량결핍이 치명적 타격을 주었다. 8백25명의 포로진술을 종합해보면 이 방면의 부대에는 8월12일 이후 한톨의 쌀 배급도 없는데다가 산악이어서 징발할 민간식량도 없어 굶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또한 포항에 대한 미해공의 맹격으로 적12사단 제1연대 제2대대가 8월11일에 포항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6백30명이었으나 18일까지 20명밖에 남지 않았다.
또한 청도「터널」파괴명령을 받은 제766유격연대가 명령대로 분산침투하지 않고 안강회랑의 정규전에 말려들어 궤멸한 이유에 대해서는 유격대장이 낙동강교두보의 후방경비가 탄탄해서 부대로서 돌진할 길 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고 보고 있다.
이렇게 동부전선에서 적8월 공세는 아군이 비교적 선전하여 적에 큰 타격을 주었지만, 이 방면의 진짜 위기와 혈전은 북괴의 최후몸부림이었던 통칭9월 공세(동부전선은 8월27일부터 전개)때에 속출했다.
그럼 이제부터 당시의 참전자들로부터 안강·기계전투이야기를 들어보겠다.

<비학산까지 적 몰아내>
▲백인엽씨(적8월 공세당시의 수도사단장·예비역육군중장·현 선인학원이사장·52) 『처음에 수도사단은 영덕·강구에서 적5사단에 포위된 우군3사단의 철수로를 개발하려고 했어요. 그러나 3사단이 장사동으로부터 해상 철수하기로 하고 적12사단과 766유격연대가 포항에 침투하는 바람에 주로 이 적에 반격을 가하게 된 거죠. 이래서 14일부터 19일까지 안강·기계에서 일대 격전이 벌어져 결과는 수도사단의 큰 승리로 끝났읍니다.
포항에 침입했던 적 12사단과 766연대를 그들의 8월 공세 시발점인 비학산까지 몰아 냈으니깐요. 뿐만 아니라 노획무기가 많았어요. 다른 우군부대 것까지 합쳐서 8월15일부터 20일까지 동부전선전투에서 야포 20, 박격포 32, 기관총 1백10, 미제M-1소총 5백50, 일제99식소 총 3백81정을 노획했어요. 적 유기시체는 3천8백에다 포로도 8백25명이나 잡았구요. 나는 적의 9월 공세가 시작됐을 때 기계전투에서 양팔에 부상하고 수도사단장에 물러났읍니다.』

<기계·안강은 절대방어선>
▲송요찬씨(적9월 공세당시의 수도사단장·전 육군참모총장·전 내각수반·현 인천제철사장·54) 『기계와 안강리의 전투는 적 5, 12사단이 경주를 돌파, 낙동강교두보를 무너뜨리려고 마지막 안간힘을 쓴 전투입니다. 국군은 여기서는 한발짝도 물러설 수 없어요. 여기서 더 밀려 경주를 빼앗긴다면 대구북방의 1사단 방어지역인 다부동 전선이나 미 해병사단이 결사적으로 방어하고있는 오봉리 전선 등은 배후를 찔려 쓸모 없게됩니다. 하긴 다부동이나 오봉리가 뚫어지면 우리가 맡고있던 안강리 진지가 지킬 수 없게되는 것도 마찬가지지요.
이상의 전선은 호각지세의 절대방어선이었어요. 적2개 사단에 수도사단은 1, 3, 17, 18기갑연대 등 5개 연대병력으로 대전했는데 병력은 물론이고 화력면에서 4대 1정도로 열세했던 아군이 방어에 성공한 것은 두가지 「모먼트」가 있었기 때문이죠. 안강 남방의 지형이 폭2㎞정도의 평야지대를 가운데 두고 경주와 포항 쪽으로 뻗는 두개의 능선이 갈라져 있어요. 그래서 적은 2개의 능선으로 병력을 분산해서 쳐내려 왔기에 열세한 국군으로 막을 수가 있었지, 만약 능선이 하나이거나 적이 어느 한쪽으로 집중 돌파했더라면 결딴이 났을지 몰라요.
또 하나는 적7사단(후에 12사로 재편)이 인접부대와의 상호 연결의 균형을 취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너무 깊이 침투하다가 참패를 당한 거구요. 어렵고 딱했던 일은 부산·대구 등지에서 모집한 장정들을 군복으로 갈아 입힐 사이도 없이 소총 한자루씩 주어 전투에 투입한 거지요.
적도 사력을 다했는데 북괴에서 김일성 다음 서열인 소위 민족보위상 겸 부원수인 최용건이 직접 전선에 나와 독전을 했어요. 무전기를 들으면 「나는 최용건이다. ××적인 인민군들아, 앞으로 나가라. 물러서는 자는 인민의 적이다」 어쩌구 하면서 악을 쓰는 육성이 들립데다.
그때 경주북방의 돌출부인 203고지(곤기봉)쟁탈전이 가장 처절했어요.
이곳을 빼앗기면 포항 쪽을 지키는 1연대(연대장 한신 중령)가 고립되고 경주가 직접 위협을 받게 되지요. 낮에는 뺏고 밤에는 빼앗기는 전투가 10여일 계속됐어요. 여기서 나는 17연대 제3대대장 조영구 중령을 즉결처분했읍니다. 민주당정권 때 그 유족에 의해 살인혐의로 고발되어 기소되는 등 세상을 시끄럽게 한 문제의 사건이죠. 나는 이 사건으로 두번이나 정치적으로 타격을 받기도 했고 인간적으로도 악몽 같은 일이어서 두 번 다시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요.
그러나 굳이 이야기하려면 그때 곤기봉에 조 중령 대대를 배치하면 밀려나곤 했는데 조중령은 명령을 어기고 대대 OP를 무단이탈, CP까지 물러서는 바람에 사병들이 전의를 잃곤 했어요. 그래서 내가 그러지 말라고 세번 경고하고 네번째에 헌병을 시켜 총살했읍니다. 그후부터 단위부대의 지휘관들이 무단후퇴를 못합데다.』
※주=이 사건은 60년8월12일 조영구 중령의 형 조용구씨가 송요찬씨를 살인죄로 서울지검에 고소, 이용훈 부장검사가 담당수사 했으나, 9월13일에 형법 제16조를 적용, 불기소 처분을 내렸음.
한편 극한적 독전수법인 이 즉결처분에 관해 전문가는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휴전 후에 즉결권 폐기>
▲태윤기씨(당시 육군중령=군법무관·현 변호사·53) 『6·25가 나 적이 파죽지세로 남침하자 국군은 철퇴를 거듭하면서 혼란의 와중에 들어가자 군기에 대한 문제를 심각히 생각지 않을 수 없게됐지요. 육본은 수원에서 총 참모장의 명령 없이 철퇴하는 부대는 엄단하겠다는 훈령을 선포하고 즉결처분권을 부여할 준비를 했던 거예요.
마침내 육본은 서기 1950년7월26일 영시를 기해 총 참모장의 이름으로 분대장급 이상의 각급 지휘관에게 즉결처분권한을 부여하는 훈령을 선포했던 겁니다(별항의 훈령전문참조).
이 즉결처분은 후에 말썽도 많았고 간혹 남용되기도 해서 물의가 있었지만 대부분은 전쟁이라는 특수상황 속에서 잘 용해됐어요.
이러다가 1년 후인 51년7월6일12시를 기해 육본은 이종찬 총 참모장의 이름으로 즉결처분권을 취소한다는 훈령을 내렸다가 20일도 채 못돼 다시 부활시켰지요. 이때는 좀 상당히 완화된 편이었지만 군기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또 부활시킨 거지요. 이것이 완전 폐기된 것은 휴전협정이 조인된 후이죠.』

<즉결처분에 관한 관계훈령 문>
▲작전훈령 제2호
육군본부 경기도 수원 단기4283년7월3일24시 철퇴에 관한 명령권한에 관한 건 부대의 철퇴는 군 최고지휘관인 육군 총 참모장이 명령할 뿐이고 예하 부대장은 철퇴를 전단하는 하등의 권한이 없음.
이후만일 철퇴의 명령 없이 철퇴하는 부대는 그 지휘관이하 엄단하겠으므로 자이 전군에 선포함.
▲육본훈령 제12호
육군본부 경북대구 단기4283년7월25일12시 각 지휘관은 좌기사항을 예하 부대장병에게 철저히 주지시켜야한다.

①명령 없이 전장 이탈할 시의 즉결처분권은 분대장급 이상에게 7월26일 영시부터 부여한다.
②전장 이탈을 묵과한 지휘관은 전장이탈과 동일한 죄과로 처단한다.
③전장이탈이라 함은 직속상관의 명령한 지점에서 명령 없이 후퇴함과 명령작전행동을 불이행함을 말한다.
총 참모장 육군중장 정일권
▲육본훈령141호
육군본부 대구 단기4284년7월6일12시 즉결처분권 취소에 관한 건 단기4283년7월25일12시 육훈 제12호 훈령으로 「명령 없이 전장 이탈할 시의 즉결처분권을 분대장급 이상에게 단기4283년7월26일 영시부터 부여했으며 전장이탈을 묵과한 지휘관은 전장이탈과 동일한 죄과로 처단하게 되었다.」
중략
역전 1주년을 경과한 금일 아군은 질적으로나 군기 면에서나 작전행동에 있어 당시의 상태와는 괄목할만한 진전향상을 보게되었으므로 민주주의국가의 국민으로서 엄연한 군법이 확립되어 있는 이상 여사한 즉결처분권을 단기4284년7월10일 영시부터 취소한다.
각급 지휘관은 부하에 대하여 골육지정으로 대하는 동시 태연 침착한 책임감을 견지하며 상시 진두지휘 함으로써 혁혁 상승의 국군전통을 조성하기에 각별 유의할 것이며 국가로 하여금 여차 불명예한 권한을 재 발동하지 않게 하도록 정진할 것을 시달한다.
육군 총 참모장 육군소장 이종찬
▲육본훈령 제194호
육군본부대구 단기4284년7월24일12시 즉결처분취소에 관한 건(추가) 육본훈령 제191호(단기4284년7월6일12시부) 「즉결처분권 취소에 관한 건」에 추가하여 좌기사항을 단기4284년8월1일 영시부로 취소한다.

①육훈 제155호(단기4284년1월13일17시부)「총포급 차량유기·금지급 엄벌에 관한 건」중 제1항 「총포급 차량을 유기 했을 시는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당 사병은 극형, 당 지도관은 철저한 책임추궁 함을 원칙」으로 한다.
제2항 「작전상 부득이 총포급 차량을 유기 혹은 파괴하였을 시는 그 증거품으로 별표 명세와 여한 부속품 혹은 차병기가 재사용 불가능함을 증명할 수 있는 부속품을 지참귀대 할 것임.
따라서 낙오병이 차 부속품을 지참치 않고 귀대하였을 시는 중대장급 이상 지휘관에게 즉결처분권을 부여한다.
육훈 제179호(단기4284년1월26일17시)「통신기재유기 손실엄금에 관하여」중 제2항 작전상 부득이 해기재를 파괴 혹은 유기했을 때는 인정받을 수 있는 증거품을 지참 귀대할 것이며 해증거품 없이 귀대한 사병에 대하여는 대대통신 장교급 이상 책임장교에게 즉결처분권한을 부여한다.
육군 총 참모장 육군소장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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