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붕구<서울대문리대 교수·불문학>무작정과 본말순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밝은 기분에 즐거운 이야기로 묵은해를 넘기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그러나 한해를 돌이켜 불때 머리에 떠오르는 건 어둡고 우울한 일들뿐임을 어찌하랴. 민속에「살풀이」라는 게 있듯이, 싸 두고 덮어두느니보다는 차라리 탁 털어 버리고 새해를 맞고 싶다.「무작정 상경」이라 더니, 온 세상이 온통「무작정」으로 허둥허동 치달리는 것만 같다. 네 바퀴로 움직이기만 하면「버스」입내하고 굴리고(또는 굴리도록 내버려두곤, 배가 물위에 떠 있기만 하면 적재량이고 뭐고 아랑곳없이 무작정 신고, 무작정「해먹는」따위 짓이 벌써 20여 년이 지났으니 이제 굴러 떨어지고 가라앉고, 여기 저기서 터지고 뚫어지고 할 때가 올 것이다. 「마이카」어 쩌 구 미련스레 무작정 자동차를 늘리더니 이젠 저녁때쯤엔 번화가마다 아주 꽉 막혀 차가 움직이질 않게끔 되었다.
지난 1년 이래로 나는 하루에도 열 두 번씩 혼자 다짐하듯 되뇌는 것이다.
『이젠 서울은 사람 살 곳이 아니다』라고. 그 소음에 그 매연「개스」로 꽉 찬거리. 과장 없이 정말 눈알이 쓰리고 숨이 막히는 것이다. 이대로 가면 번화가에서 어린이들이 퍽퍽 쓰러지는 날이 올 것만 같다.
「파리」에서는 종로 네거리 같은 번화가에서 봄·여름이면 다방(카페)앞의 차양만 친 인도에 의자를 늘어놓고「코피」를 마신다면 서울 시민에겐 좀처럼 믿어지지 않을게다. 서구를 돌아온 분이면 누구나 느꼈을 터이지만 동경에 오자 거리에서 차량의 배기「개스」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간판과 원색「네온사인」등. 서울은 그 동경보다 공해 도가 10배라던가. 이왕 뒤따르려면 이웃나라의 나쁜 점만 쫓을게 아니라, 좀 더 앞선 사회를 본뜰 일이다. 이 이상「사람 살 곳이 아니라」는 건 비단 거리의 그것뿐만이 아니다. 그 거리 안에 들어있는 세상은 대소, 상하 없이 구석구석이 더 혼탁하기만 하니 말이다.「혼탁」정도의 말로는 표현이 안 될게다.
그렇게 모든 것이「무작정」이니 도시 본말이 바로 서고 근간과 기업의 구별이 될 리 없다. 이왕「프랑스」예를 들었으니 몇 가지만 더 예거하겠다. 2백년 전에 세계에서 가장 완벽한 하수도 망을 구축하고 1백20년 전에「수에즌」운하를 뚫고, 70년 전에 유명한「파리」지하철을 개통한 토목공사의 나라「프랑스」가 고속도로를 본격적으로 착수한 것은 불과 10년 전부터이다.
도시뿐만 아니라「프랑스」의 온 국토가 하나의 공원처럼 구석구석이 알뜰하게 가꾸어져 있다. 그런데 그들은 19세기 초엽에 벌써「치수 조림 대학」을 둘이나 세웠던 것이다. 그 중에도 국립대학은「프랑스」의 명문 대학인「파리」의「이공과 대학」(폴리테크닉) 2년 수료 후에 학생의 지망에 따라 입학시키는 것이다. (우선 그 방면의 전문대학을 세웠다는 점, 그것이 이공 과와 농림과를 겸 합한 점, 그만큼 고급 대학으로 격을 높여 고급 관리로 양성하여 우대한다는 점에 주의할 일.) 중앙에 전문 부서가 있고, 각 지방에 주재시켜 치수공사·시설은 물론 자기 관할 구역을 자기집 정원들 보듯이 가꾸게 하는 것이다.
수백 년 이래로 홍수 한기를 마치 갈마드는 천형처럼, 마치 연중 항쟁처럼 감수해 오는 백성 중의 한사람인 필자가 이 사실을 알았을 때는 그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피 아 간의 사정이 다르다는 것을 누구보다 필자가 뼈저리게 절감하고 있다. 그러나 순리와 역리의 구별은 어디나 마찬가지다. 부디 새해부터는 조금씩이라도 하나하나 바로 잡혀 나가기를 기대하고 나 자신은 주말이나마 잠시 서울서 뚝 떨어진 산문에서 보낼 수 있는 초가삼간이라도 하나 마련하였으면 하는 조그마한 꿈에 희망을 걸고 새해를 맞아 보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