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득의 인생은 즐거워] 칠성이가 웃는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342호 30면

상대는 윗동네 칠성이였다. 명절 연휴가 끝나가는 어느 오후 동네 총각들은 심심했던지 조무래기들을 모아놓고 공터에서 권투시합을 열었다. 소방도로라고 해서 소방차 하나가 간신히 다닐 만한 길이 있었는데 그 길을 기준으로 위아래 동네에 사는 조무래기들끼리 맞붙게 하는 경기였다. 헤드 가드는 없었지만 글러브도 있고 각목과 노끈을 이용해 만든 가설 링도 있어서 제법 시합 같았다.

나는 아랫동네 조무래기 선수 중 한 명이었다. 그때까지 권투 글러브도 한번 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긴장도 되고 살짝 겁도 났는데 칠성이를 보고는 안심이 되었다. 칠성이는 내 또래였지만 나보다 덩치도 작고 힘도 약했다. 나보다 싸움도 못했다. 그것은 꼭 싸우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사내아이들은 놀다 보면 자연스럽게 힘을 겨룰 일이 생기는데 나는 한 번도 칠성이에게 밀린 적이 없었다.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언제 왔는지 동네 계집아이들도 다 모였다. 평소에도 우스갯소리를 잘하는 세탁소집 봉수 형이 중계방송을 흉내 냈다. 우리 쪽 코치를 맡은 사람은 안다 형이었다. 안다 형은 별명처럼 모르는 게 없이 다 아는 형이다. “권투는 딱 세 가지만 잘하면 돼. 눈을 뜬다, 움직인다, 때린다.” 갑자기 내 뺨을 때린다. “봐, 이렇게 눈을 감으면 안 돼. 맞을 때도 눈을 떠. 알겠지. 가볍게, 계속 뛰면서 움직여. 나비처럼. 그래야 벌처럼 쏠 수 있거든. 마지막, 이게 제일 중요한데, 때려. 맞지 말고 때리란 말이야. 그러면 무조건 이기게 돼 있어.”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싶었지만 나는 그냥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안다 형이 말했다. “3라운드 시합이니까 체력 안배를 잘해야 해. 1회전에서 힘을 다 빼면 안 돼. 1회전은 탐색전이야. 자, 왼팔을 쭉 뻗어봐. 그래. 그걸 잽이라고 하는 거야. 가볍게 툭툭 던져. 상대가 공격한다고 무조건 주먹을 휘두르지 말란 말이야. 1회전에는 좀 맞아도 괜찮아. 어차피 경기는 3회전까지니까.”

심판은 연탄가게 만기 형이 맡았다. “아무 데나 때려도 괜찮지만 벨트 아래 특히 고추는 때리면 절대 안 된다.” 몸짓까지 섞어가며 경기 규칙을 설명하자 구경하는 계집아이들이 와르르 웃는다.

칠성이는 복싱의 ‘ㅂ’자도 모르는 것일까? 1라운드는 탐색전인데 1회전 공이 울리자마자 내게 덤벼들었다. 칠성이가 퍼붓는 소나기 펀치에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나도 함께 주먹을 휘두르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1회전은 탐색전이니까. 좀 맞아도 괜찮으니까. 3라운드까지 뛰려면 체력을 안배해야 하니까. 나는 가드를 올리고 계속 맞았다. 맞을 때 아프지는 않았는데 꽤 어지러웠다. 난 뭘 탐색했을까? 줄곧 눈을 감고 있었는데.

1분은 길었다. 마침내 1회전이 끝나고 30초 쉬는 시간 동안 칠성이는 간이 의자에 앉아 쉬었지만 나는 쉴 수 없었다. 줄곧 서 있었다. 어서 2회전이 시작되기만 바라면서 말이다. 안다 형이 내 허리춤을 잡고 당겼다 놓았다 하면서 말했다. “작전대로 돼가고 있어. 이제 마음껏 때려.” 2라운드 공이 울리자마자 뛰어나가던 나는 보았다. 칠성이가 하얀 수건을 흔들며 웃는 것을. 어이없는 칠성이의 기권으로 경기에서 이겼지만 나는 진 것보다 기분이 더 나빴다.

그날 이후 칠성이는 나만 보면 자꾸 웃었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의 기획부장이다. 눈물과 웃음이 꼬물꼬물 묻어나는 글을 쓰고 싶어한다. 『아내를 탐하다』 『슈슈』를 썼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