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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제자는 필자>|<제4화>명월 관|이난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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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최초의 요리 집>
명월 관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먼저 문을 연 요릿집이다.
내가 서울에 와서 처음으로 명월 관을 본 것이 1913년, 내 나이 13세 때였다.
그때 명월 관은 황토 마루 네거리(황토 현), 지금의 세종로 동아일보사 자리에 있었다. 회색 빛 2층 양옥으로 된 명월 관은 울타리가 없었고 대문은 서쪽으로 나 있었다. 2층에는 귀한 손님들, 아래층에는 일반손님을 모시는 것이 상례였으나 꼭 그와 같이 지켜지는 것은 아니었다. 매실이란 이름을 가진 특실의 방이 하나 있어 아주 귀한 손님이나 그윽한 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제공되었다.
아래층은 온돌이었으나 2층은 마루 바닥에 일부는 양탄자, 일부는 돗 짚자리(다다미)를 깔았고 겨울에는 숯불을 피운 화로가 방 가운데 놓여졌다.
처음 명월 관 주인은 안순환씨. 그는 지금부터 61년 전인 1909년에 명월 관을 열었다. 안씨는 원래 상인이 아니었다. 궁내부 봉임 관 및 전선 사장으로 있으면서 어선과 철 연을 맡아 궁중 요리에 반평생을 보냈던 사람이었다.
그는 순종을 모시고 창덕궁에 있을 때 이미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순종에 대한 일인들의 간섭이 너무나 심한데 분통이 터져 사표를 내고 벼슬을 그만 두었다는 것이다.
어떻든 안씨는 명월 관을 개업하여 궁중 요리를 일반인에게 공개하게 되었고, 술은 궁중 나인 출신인「분이」가 담그는 술을 대 쓰는 바람에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분이」의 성명은 잘 모르나 그 무렵 그의 술 만드는 솜씨는 상류사회에서 널리 알려져 있을 만큼 이름 났었다. 처음에는 약주·소주 등을 팔았지만 나중에는 맥주와 정종 등 일본 술을 팔았다.
이 무렵 융희 3년(1909년)에 관기제도가 폐됨에 따라 지방과 궁중의 각종 기생들이 방 붙일 곳을 찾아 서울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명월 관에는 수많은 기생 중에서도 어전에 나가 춤과 노래를 불렀던 궁중기생과 인물이나 성품 및 재주가 뛰어 난 명기들이 많이 모여들어 자연히 장사도 잘 되고 장안의 명사와 갑부들이 모여들어 일류 사교장이 되었다.
초기의 명월 관 손님은 판서·참판 급의 대감과 친일파 앞잡이 거물 등이었으나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이들 자제들이 모습을 나타냈고, 그 뒤에는 동경 유학생·문인·언론인·신흥 부호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또 외국에서 잠입한 애국 지사들이 왜경의 눈을 피하기 위해 밀담 장소로 이용하는 곳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명월 관 최고의 영예는 역시 명월 관 분점이었던 순화 궁·태 화관에서 기미 독립선언을 한 33인의 독립 연과 독립선언이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후 명월 관은 현재 종로3가「피가디리」극장 자리에 옮겨졌고 주인 또한 이종구씨로 갈렸다. 각계 각층 명사의 발길과 꽃다운 명기들의 치맛자락이 끊이지 않았던 명월 관은 6·25때까지 요리업체의 왕자로 군림해 왔으나 괴뢰군들이 서울을 버리고 후퇴할 때 불살라 버려 자리 째 없어지고 말았다.
명월 관이 한참 인기가 있을 때『땅을 팔아서라도 명월 관 기생노래를 들으며 취해 봤으면 여한이 없겠다』는 시중의 농담을 낳게 했고 시골에는 명월 관을 본뜬 조그마한 명월 관이 도처에 간판을 내걸기도 했다.
매일 밤 명월 관에 가보면 현관에 기생들의 신발이 그득히 있었다. 그때 기생 신은 가죽 위에 비단을 입힌 비단신을 신었는데 무늬가 곱고 색깔이 여러 가지였다.
명월 관「보이」들은 기생들이 신고 온 신발을 서방님이 있는 유부기와 서방이 없는 무 부기 별로 구별하여 현관에 나란히 갈라놓아 들어오는 손님에게 손님이 어느 정도 왔으며 누가 왔는지 대강 짐작하게끔 했다.
명월 관이 대감들의 놀이터로부터 시작하여 친일파들이 거들먹거리며 돈 쓰는 곳으로, 다시 나라를 빼앗기고 출세 길이 막힌 양반 집 자손들이 울분을 달래는 장소로, 돈보다도 신문화에 매력을 느낀 기생과 유학생·언론인·문인과의「로맨스」가 엮어지는 은밀한 장소로, 다시 우국지사들의 밀담이 오가는 숨막히는 곳으로 성격을 변해 감에 따라 손님의 질은 달라졌지만 손님의 양은 날이 갈수록 불어나 성시를 이루었다.
명월 관이 이처럼 붐 비자 서울 장안에는 곳곳에 요릿집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봉천관·영흥관·혜천관·세심관·장춘관 등이 있었고 일본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남촌에는 일수·화 일·간대본 등 일본 요리 집도 생겨났다. 특히 화신 동에 있었던 화 일은 창덕궁에서 일어나는 순종의 일거 일동을 궁중에 있는 친일 매국노가 매일매일 왜경에 고자질해 받치는 곳이라고 이름나 뜻 있는 사람들은 그 쪽에 발길을 돌리기조차 싫어했었다.
명월 관은 청풍명월에서 떼 온 이름이라고 들었다.
명월 관은 명사와 한량들에게 장소와 푸짐한 음식을 대접했지만 맨 먼저 주인 안씨는 그후 망하고 그의 자손에 대한 소식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 최근 친구들의 말을 들으면 안씨의 자부가 시내에 어느「버스」정류장에서 광주리에 물건을 담아 파는 것을 봤다고 하니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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