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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수<시인>|연말의 자기정리 열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우리 사단의 연말 풍속의 하나가 된 자기정리작업은 무수한 시집으로 얼굴을 다듬고 계속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한편 신반에도 게을리 하지 않고 의욕에 찬 작품들이 발표되고 있는 일은 기꺼운 일이다.
이제까지『들과 사랑』이란 동인지에 집결되었던 여류 시인들이 한 묶음 시의 신작을 모두 어 앤돌러지『청미』를 내놓았다. 동인 가운데 새 얼굴들, 김여정·이경희·임성숙 등이 새로이 참가한데 반하여 김숙자·김혜숙·박영숙 등이 빠진 것은 서운한 일이다.
새로이 참가한 김여정의『어느 아침의 새』의 감성이 좋았고, 이경희의『분수 V』도 만만찮은 기량을 보여주고 있다.
이 달 잡지에 발표된 작품 가운데 가장 의욕을 보인 시인은 고은씨로 그는 8백 행에 가까운 장시『니르바나』(현대시학)를 비롯하여『지경집』(문학과 지성)이란 이름 밑에 4편의 작품을 한 묶음 발표했다.『니르바나』는「부다」의 죽음을 다룬 작품으로 종교적인 어려움은 있으나, 그 제재에 비하면 비교적 읽힌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이 시인은 현란한 만큼 부분적인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면서도 전체의 맥락이 항상 분열되었던데 비하면 이번 작품은 그 즉흥성이 많이 가시고 비교적 계산하고 기획하여 쓴 것 같다.
그러나 욕심대로 하자면 더 전달력이 있게 전달력이 있게 서사시로 취급해 봄직도 하지 않았나 싶다. 물론 그것은 시인의 자유이지만 이 작품에 다뤄진 종교적인 어려움을 역시 독자가 감당하기 역겹겠기 말이다.
같은「현대시학」에 오래간만에 이형기의 신작 한 묶음이 발표되었다.『하늘 만한 안경』등 5편이 그것이다. 이 시인은 감성이 유별나게 맑고 정겨워서 내가 좋아하는 시인의 한 사람이지만 이번 발표된 작품들은『먼발치에서』한편을 제의하고는 또 새로운 경지를 모색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특히『하늘 만한 안경』은「안경」이란 아이디어의 채택이 이 작품을 유별나게 한 듯 하다. 이<하늘 만한 안경>이란 무엇의 메타퍼도 아니고 이미지도 아니다. 억지로 하면<어린이의 눈>같이 흐리지 않은 눈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역시 그것은 억지 같다. 그래서 나는 이<하늘 만한 안경>을 아이디어로 보고 싶다. 이 아이디어의 조작이 없었다면 맹랑한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이 아이디어가 이 작품의 밀도를 조성한 듯 하다. 이런 것은『바다』에서도 엿보인다. 물길의 높낮이를 적절히 조절하고 있는 것도 그런 것이리라.
어쨌든 이 시인이 시를「만드는 데」상당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듯이 보인다.
여기 비하면 시인의 인간과 생활의 체취가 밴 작품으로, 천상병의『불혹의 추석』(시인) 등 5편을 들 수 있지 않을까. 이 시인을 잘 아는 사람에게는 조그만「미소」이지만 이 시인을 모르는 독자들에게는 그 생활과 사고에 얼마간 당황하지 않을까 모를 일이다. 가령 <막걸리 한 잔 빈촌 막바지 대폿집 찌그러진 상위에 놓고 어버이의 제사를 지낸다>(불혹의 추석)는 시구를 읽고 그 풍경을 그려보면 그것은 확실히 코믹한 것이지만, 이 시구를 전편의 시속에서 읽자면 가슴이 메도록 공감을 받게 된다. 일상의 의식이 공소한데 비하여 이것은 마음으로부터의 의식 아닌 의식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 시인의 체취는 <보지도 못한 내 간이 심하게도 쿠데타를 일으켰다> (간의 반란)도 얼 핏 보기에는 코믹한 사설이지만, 자기의 간병에 대한 절실한 표현을 여기서 느끼게 한다. 강렬한 개성이 아니고는 흉내내기도 어려운 시구들이다. 이형기의 만드는데 비하여 「우러나는」의 방법의 차이를 보여주지만 이 달의 가작들이었다.
같은「시인」지에 정현종의『우리는 죽어서 자기의 가장 그리운 것이 된다』등 5편을 발표하고 있다. 이 젊은 시인의 이번 5편의 작품의 수법상 공통점을 찾아보면,「반복의 사용」에 있는 것 같다. 수사를 크게 피하고「장소」적인 설정이 없다.
그러므로 자칫 메마르기 쉬운 결함을 반복으로 커버하면서 사념을 전개시키고 있는 점이 특징적이다.
끝으로「시지」나「계간지」에서 이미 발표된 작품의 재 수록, 혹은 발표된 연대가 상당기간 지난 것의 번역 등이 많이 눈에 띄는데 이것은 잡지의 사명에서 벗어나는 일처럼 생각된다. 가령「시인」지의 라·풍텐의「우화시」, 아르튀르·렝보의『지옥의 계절』, 막스·자콥의『젊은 시인에게 주는 충고』,「문학과 지성」지의 김춘수의『처용단장 1부』,「현대시학」지의 앙드레·지드의『나르시스 논』등 가끔 이런 것들을 보는데 잡지의 시사성에 어긋나는 것 같아서 사족을 붙여 둔다.
이밖에 박두진의『가을 나비』(중앙), 박재삼『죽음의 노래』,『현진에게』(현대문학), 이성부의『술꾼』(신동아)등에 언급하고 싶었으나 지면이 다한 것 같아 할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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