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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 분석된 북괴 5차 당 대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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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국제사회에서 고립된 채 두터운 장벽에 가려있는 북괴의 동태는 일본의 동경을 뉴스의 중계지로 하여 때때로 자유세계에 그 모습이 드러난다.
따라서 70년대 북괴의 정치·경제·외교 그리고 대남 공작 방향 등이 노출된 지난13일 폐막된 북괴의 소위 노동당 제5차 대회는 일본에서도 중대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었다.
일본은 북괴의 공식보도 외에 일본공산당기관지특파원의 현지보도와 그밖에 정보 루트를 통해 당대회의 성격·배경 그리고 전망 등이 각종연구기관에서 분석되었다. 일본의 대 북괴사정연구기관은 이번 당 대회의 특징으로 ①김일성 우상화의 고정증대화 ②정치이념과 경제정책상 소련경사에서 중공경사에의 전환 ③일부권력층의 변동 등을 꼽고 있다.
우선 경제정책의 분석을 보면 가장 중요한 것은 작년 말까지 이른바 5개년 경제계획으로 굳어 있던 것이 6개년 계획 (71년∼76년)으로 변경된 것이다. 작년 12월의 소위 당 중앙위원회총회 때까지는 전자를 상정하고 있던 것이 지난9월 경제담당 부수상 정준택의 모스크바 방문 후 급자기 변경된 것으로 보고 있다. 5개년 경제계획은 정이 소련에 제시하고 원조를 요청했으나 소련은 민족주의적 경제계획안 이라면서 시정을 요구, 정이 시정을 거부한 것으로 보인다.
소련의 이와 같은 압력에 화가 난 김일성은 대외경제위원장인 김경련을 북평에 급파했다. 중공은 지난4월 주·김 공동성명 후 정치적인 밀착상태와는 달리 경제적·군사적으로 북괴가 소련에 접근하고있음을 지적, 연구검토라는 소극적 반응을 보여왔었다. 소련서 돌아온 부수상 정은 즉시 북평으로 날아 석유부문개발에 이상할 정도의 정열을 쏟아 중공업 우선의 경제계획을 제시, 중공은 북괴가 소련경제권에서 이탈한다는 조건아래 중공업정책을 지지, 원조할것을 약속함으로써 당초계획은 6년으로 변경되기에 이른 것이다.
1966년 이후 북괴에 숙청선풍이 몰아쳤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68년 초의 민족보위상 김창봉·총 참모장 최광·대남 공작책 허봉학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에 이어 금년 초에 이르러 당 중앙요직과 소위 최고인 회의나 정부의 요직에 있던 이영호 이국진 한상두를 추방했고 지난 7월에는 4차 대회까지 서열 제4위 실력자였던 부수상(대장) 김광협·부수상 이종옥이 추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광협은 제2차 대전 중 만주에서 김일성과 고락을 같이한 이른바 항일무장투쟁 때의 동지이고, 이는 전후 과학기술향상의 총수로 북괴경제에 크게 기여한 자라 한다. 이가 재정상이자 자재공급위원장을 역임한 한상두와 함께 우익수정주의자란 낙인이 찍혀 제거된 것은 경제정책의 전환과 상통하는 인사로 추측된다.
이번 당 대회에서는 중앙위원 1백57명과 동 위원후보 55명을 선출했고 당 중앙위정치위원으로 김일성 최용건 김일 박성철 최현 김영주 오진우 김동규 서철 김중린 한익수, 정위 후보위원에 현무광 정준택 양형섭 김만금, 당 중앙위 서기에 최용건 김일 김영주 오진우 김동규 김중린 한익수 현무광 양형섭을 선출했다.
이 인선에서 주목받은 것은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가 당의 조직담당서기로서 지금까지 서열 12위에서 6위로 점프·업 한 점이다. 김영주는 금년상반기부터 중기까지 신병치료를 이유로 장기간 루마니아에 체류했다. 이런 장기간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그가 김일성의 후계자로 지목되고 새로운 실력자로 등장한 것이다.
이밖에 이번 인사는 ①김일성 대학출신의 젊고 새로운 얼굴들이 고개를 들었고 ②정책으로 내세운 아시아 아프리카 외교강화를 뒷받침하듯 전 외상이자 부수상인 박성철·김동규·서철 등의 진출 ③숙청설이 있던 김광협·이종옥 등이 무산하고만 것 등이 특징이다.
김일성은 68년말부터 69년 초에 푸에블로호 사건과 대남 무장공비투입 사건으로 상징되는 대남 및 대소정책판단을 잘못했다고 김창봉 최광 허봉학을 잘랐다. 그 후임으로 민족보위상에 최현, 군 총 참모장에 오진 우, 대남 공작 책에 김중린을 세웠다. 최와 오는 제2차 대전 때부터의 김일성의 복심이고 김은 모략적인 평화통일의 기수이다.
통일혁명 당과 같은 정치공작을 주로 하면서 『금후에도 국제정세와 북괴내부정세 및 한국정세를 견주어 효과적 전술을 채택한다』 (금일성 당 대회연세)지만, 여전히 무장공비남파전술을 버리지 않을 것만은 틀림없다.
북괴의 경제사정은 김일성의 호언대로 받아들여도 호조는 못된다. 70년도의 세출 중 군사비가 31%로 『너무나 큰 부담이었다』(김일성)는 것이다. 61년부터 시작한 7개년 경제계획도 목표를 달성하지 못해 3년 더 연장했고, 이번에 제시한 6개년 경제계획도 공업생산부문의 성장목표가 연율 14%란 높은 것이고 실현가능성은 희박하다고 관측되고있다.
경제적으로 성장이 지지부진하고 정치·군사적으로는 강경 일변도의 중공에의 접근 책을 택한 북괴는 노장의 지도적인 실력자를 권력주변에서 축출하고 젊은 층을 앉혀 66년 가을 제2차 당 대표자 회의에서 추진하기로 한 국민기만 적인 김일성 우상화운동에 광분했다.
북괴의 주민구성을 보면 ①일제통치의 경험자 ②미군정경험자 ③한국 동난 중 UN군 통치에 협력한 자 ④한국으로의 피난민가족 ⑤농업협동화의 강행에 따라 토지를 수탈 당한 지주⑥일본서 송환된 교포들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다. 이밖에도 제2차 대전 후 소련 등 동구제국에 유학 갔던 자가 북괴경제의 중추지대에 많이 배치되고 있다. 김일성에게 외부 세계를 아는 이들은 가장 골치 아픈 존재인 것이다.
이것이 그의 우상화운동을 낳게 했고 이들을 현혹시키기 위해 미국·일본의 제국주의를 읊고 수정주의자(소련)를 비난하여 소비재생산의 희생에 불만을 품는 국민의 생산의욕감퇴를 막겠다는 심산인 것이다. 【동경=조동오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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