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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철호의 시시각각

포퓰리즘, 그 다음의 불편한 현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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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이철호 논설위원

진보 교육진영의 오랜 꿈은 3무(無)에 있다. 입시가 철폐되고, 등록금이 필요 없으며, 성적 경쟁이 없는 것이다. 그런 곳이 있을까? 있다. 오스트리아의 빈대학은 12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명문이다. 634년의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이 대학은 3무의 상징이다. 간단한 검정시험(마투라)을 치르면 들어갈 수 있다. 마투라 점수와 상관없이 누구든 입학이 가능하다. 여기에다 등록금은 공짜나 다름없고, 시험이 없으니 학점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오스트리아의 좌파 연립정권이 만든 결과물이다.

 그럼 과연 빈대학이 천국일까? 글쎄다. 우선 유럽연합(EU)에서 아무나 몰려들어 학생수가 10만 명에 육박한다. 세계 명문대들의 평균 정원보다 30배나 많다. 제대로 교육이 될 리 없다. 매년 QS의 대학평가 순위가 뚝뚝 떨어져 올해는 서울대(35위)·연세대(114위)·고려대(145위)보다 훨씬 낮은 158위로 내려앉았다. 노벨상 역시 1973년의 콘라트 로렌츠(생리·의학), 74년의 하이예크(경제학) 이후에 뚝 끊어졌다. 이 대학 출신의 슘페터·지크문트 프로이트 같은 대학자들은 기억 속의 희미한 화석으로 남게 됐다. 3무가 빚어낸 서글픈 현주소다.

 우리의 야당과 진보진영의 구호는 참 근사하다. 골목상권이나 상생협력 같이 매력적인 공약들로 넘쳐난다. 하지만 그 뒤의 현실은 딴판이다. 대기업 계열사들의 공공기관 구내식당 퇴출만 짚어보자. 정부는 지난해 에버랜드·아워홈·현대그린푸드 등 6개사를 배제권고 대상으로 지정했다. 당초 취지대로라면 중소업체들이 살판났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엉뚱하게 그들이 물러난 자리를 외국계와 중견업체들이 차지했다. 1~6위가 빠지자 그 바로 밑의 동원홈푸드(동원그룹)·이씨엠디(풀무원)와 다국적기업인 아라마크가 집중적인 혜택을 입은 것이다.

 정작 이 규제를 주도했던 국회는 직원식당 운영권을 배제대상인 신세계푸드에 맡겼다. 정부의 세종청사 구내식당은 동원홈푸드가 차지했다. 입찰 조건을 ‘하루 평균 2500명 이상의 집단급식 운영 실적이 있는 업체’로 제한한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당선인 시절 중소기업 대책회의를 끝낸 뒤 줄을 서서 기다리며 음식을 담았다. 하지만 그 구내식당도 대기업 계열사가 운영한 곳이었다.

 물론 뜻밖의 소득도 있다. 오스트리아는 3무 정책 덕분에 대학진학률이 10%로 뚝 떨어졌다. 굳이 대학을 나와도 별 볼일 없기 때문이다. 대신 우리로 치면 전문대와 같은 ‘파크호크슐레’가 대단한 인기다. 이곳에선 실용적인 전문기술을 하루 8시간씩 엄격하게 가르친다. 학생들을 자율적으로 뽑고, 출석체크와 학점 관리도 매우 짜다. 그럼에도 세계 곳곳에서 유학생이 몰려온다. 과연 우리의 ‘반값 등록금’ 공약도 이런 긍정적인 효과를 낼지 지켜볼 일이다.

 문제는 한번 맛본 규제의 단맛은 좀체 못 잊는다는 점이다. 요즘 을(乙)의 요구는 끝이 없다. 황당한 요구마저 서슴지 않는다. 지난 8월 골목상권살리기소비자연맹·한국외식업중앙회 등 150여 개 단체들이 들고 일어났다. 대기업 사옥 주변의 식당들이 장사가 안 되니 “대기업들의 구내식당을 없애 달라”고 요구했다. 안 되면 100만여 명의 회원들이 동맹휴업에 들어갈 것이라 위협했다. 시장원리는 증발되고, 머릿수와 정치논리가 판치는 세상이다.

 이명박정부 시절 박재완 기재부 장관은 “약자 보호가 규제 위주의 네거티브로 흐르면 지속가능하지 않을 것”이라 걱정했다. 차라리 갑(甲)에게 돈을 거둬 펀드를 만들거나 기술 지원을 해주는 포지티브 정책이 훨씬 낫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선거 때면 온갖 네거티브 공약이 쏟아지고, 그 다음의 추악한 뒷모습은 모른 체한다. 대처 전 영국 총리는 “모두를 만족시키는 정치는 없다”고 했다. 달콤한 공약일수록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영국에는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善意)로 포장돼 있다’는 속담이 있는지 모른다.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