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골목] ① 서울 문래동 창작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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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래동 3가의 한 철공소 건물에 그려진 벽화. 버려졌던 옥상이 캔버스로 다시 태어났다. 담장 너머로 샤링 골목이 보인다. 오종택 기자

골목은 우리네 삶의 터전이다. “골목길 접어들 때 내 가슴은 뛰고 있었지”라는 노랫말처럼 골목은 누군가에겐 추억이 깃든 장소다. 동시에 지역의 발전 과정이 고스란히 담긴 역사책이다. 거센 개발 바람에도 시민의 삶을 품은 채 건재한 골목들이 있다. 공존과 변화를 시도 중인 골목길을 소개한다.

2호선 문래역 7번 출구를 나와 5분가량 걸어가면 아파트 단지 사이로 곧게 뻗은 길이 나온다. 이어 골목길 양옆으로 낯선 풍경이 펼쳐진다.

 입구에서부터 “칠컹칠컹” 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금속을 자르는 절단기가 토해내는 기계음이다. 반듯하게 잘린 쇳조각은 “딸캉” 소리를 내며 시멘트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낯선 소리에 섞인 비릿한 윤활유 냄새도 피해갈 수 없다. 냄새에 금세 코끝이 찌릿찌릿해진다. 시멘트 바닥 사이사이에 들러붙은 누런 쇳물만이 이 골목의 50여 년 역사를 가늠케 한다.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3가. 크고 작은 철공소 1350여 곳이 모여 있다. 그래서 ‘철공소 골목’이라 불린다. 이 중 제법 규모가 있는 철공소들이 밀집한 골목은 ‘샤링 골목’이란 이름이 붙었다. 샤링은 시어링(shearing)의 속어. 금속을 원하는 모양대로 자르는 작업을 말한다.

 샤링 골목은 1970~80년대 한국 경제를 재단했다. 승용차만 한 철판이 이곳을 거쳐 손바닥만 한 기계 부품으로 변신했다. 40년 토박이라는 문래직선(直線) 대표 남성진(69)씨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 게 이곳”이라며 “이 골목에선 사람 빼곤 못 만드는 게 없었다”고 말했다.

 골목은 60년대 후반 무렵 형성됐다. 청계천에서 이전한 철공소들이 하나 둘 터를 잡으면서다. 지방에서 상경한 20대 청년들이 망치 한 자루를 들고 땀과 젊음을 바쳐 일했다. 80년대 중반부터 샤링 골목에서 일해 왔다는 이모(50)씨는 “당시엔 철판을 실은 화물차들이 여의도 근처까지 꼬리를 물고 기다릴 정도로 일감이 많았다”고 말했다. 샤링 골목은 IMF 구제금융을 거치면서 쇠락하기 시작했다. 대형 철공소들은 시화공단 등 지방으로 이전했다. 근처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골목은 도심 속 섬처럼 고립됐다. 버려진 건물이 늘면서 슬럼화가 진행됐다.

 골목이 다시 살아난 건 2000년대 들어 20~30대 예술가들이 들어오면서다. 임대료가 비싸지면서 홍대와 신촌을 나온 작가들이 주축이었다. 스튜디오 빛타래를 운영하는 사진작가 채경완(34)씨는 이를 “기묘한 동거”라고 표현했다. 그는 “뉴욕 브루클린의 덤보(dumbo)처럼 폐공장을 예술 창작촌으로 만든 전례는 있지만 노동자와 예술가들이 공존하는 곳은 문래동이 전 세계적으로 유일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샤링 골목이 ‘커먼 그라운드(common ground·공통의 토대)’의 성공 모델이 된 이유다. 다름을 품을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난 것이다. 대략 200명의 예술가는 2009년부터 버려진 건물 벽에 그림을 그려 넣고 있다. 해마다 골목은 변신한다. 최근엔 노동자와 예술가들의 교류를 위한 산악회도 결성됐다.

 7년 전 문래동에 온 가구제작자 이경원(45)씨의 말이다. “이곳 분들은 재래식이란 말을 제일 싫어해요. 쇠를 다듬는 건 원초적인 일이지 결코 재래식이 아니에요.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고 또 어딘가는 필요한 일이니까요. 그게 쇠와 예술이 서로 통하는 부분인 것 같아요.”

글= 강기헌 기자
사진=오종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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