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우」재선 길 복병「두옹·반·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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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구엔·반·티우 월남대통령이 31일 상하 원 합동회의에서 취임 후 가장 자신에 찬 목소리로 반공승전을 역설한 다음날인 1일 두옹·반·민 퇴역장군은『25년간의 전화에 시달린 국민들에게 제일목표는 평화이다』라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이 두 연설에 나타난 두드러진 이견은 민 장군이 티 우에 맞서 출마하리라는 관측과 함께 71년에 전개될 정부통령 선거의 쟁점을 단적으로 표현한 점에서 주목된다.
63년에 고·딘·디엠 정권을 정복하는데 주역을 맡았던 민 장군은 64년 구엔·칸에 의한 쿠데타로 방콕에 망명했었다.
그는 전시 하에서도 반민주정치를 배격한 관록과 남북월남에 대한 폭격을 반대한 유일한 장성으로서 민족주의자의 이미지를 굳혀져 광범한 국민의 지지를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68년 10월 귀국했으나 티 우 대통령의 정권참여초청을 뿌리치고 지금까지 조용한 생활을 지켜왔다.
그러나 사이공의 정가에서는 그가 베트콩 측과 티우 정부를 다같이 견제하면서 민족주의 평화세력을 규합할 수 있는 적격자라는 점을 들어 그의 출마를 기대해 왔던 것.
1일에 행한 그의 연설은 그러니까 그와 같은 기대를 어느 정도 확인해 주었다 할 것이다.
민 장군은 지난 67년 선거 때 이미 자신의 대통령출마의사를 밝힌바 있다. 그러나 그때 티 우 대통령은 방콕으로 특사를 보내어 그의 귀국을 만류함으로써 그의 의사를 좌절시켰던 것이다.
사이공 정가에서 그에게 거는 기대는 정치인으로서의 민 장군의 역귀에 바탕을 둔 것은 아니다. 사실 그가 디 엠 정권을 무너뜨린 후에 보인 활동은 무능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무능이 오히려 독재자가 아니었다는 이미지를 굳혀 강점으로 둔갑하게 된 것이다.
민 장군의 강점은 월남이 처해있는 특수한 정치상황에 있다. 67년의 투표결과에서 확실해진 점이지만 월남에서는 반전과 반정부감정이 미묘하게 서로 얽혀있다.
그때, 디엠 이후 정권에 입각한 경력도 있고 국민간의 지지도도 높았던 트란·반·후웅 전 수상이, 무명사이면서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를 후보표징으로 내세워 평화공약 붐을 일으켰던 트루옹·딘·주에게 압도당한 것은 그런 일반적 감정을 표현해 준 것이었다.
3년이 지난 지금 평화무드는 줄어들었다고 할 수 없으며 따라서 총력전 체제를 굳혀온 티우-키 조에 비해 민 장군이 이런 평화무드를 유리하게 이끌 수 있는 가능성을 그만큼 불어났다고 볼 수 있다.
평화에 대한 두 사람의 견해차는 이번 발언에서도 뚜렷하다. 티 우 대통령이『우리의 힘이 강하기 때문에 공산 측의 협상거부에 관계없이 우리의 승리는 결정적』이라고 호언하면서 여하한 평화 안에도 연정수립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 반면 민 장군은『온 세상이 호의를 가지고 외국인은 월남인의 심리나 열망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월남인의 자결권을 강조했다.
승전이 가능하다는 티 우 대통령의 입장에 대해 전쟁의 계속은 월남의 외세의존도를 높일 뿐이라는 민 장군의 반론은 특히 반전·반정부 세력 중 전통적으로 가장 과격한 세력인「안쾅」사원 중심세력으로부터 크게 호응을 얻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밖에도 민 장군의 이러한 입장은 남부월남의 토착 부 세력과 조직이 잘된 카톨릭 세력이 결합하여 사이공 정부를 지배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이 토착세력은 정치타협이 자신들의 정치참여를 위한 첩경이라고 믿어왔다.
물론 이러한 잡다한 반정부 세력이 결합될 때 그 안에서 일어날 갈등은 민 장군의 지지세력에 많은 문제를 던질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67년 선거에서 티 우-키 조가 겨우 전투표의 40%로 당선되었으며 모든 평화후보들의 투표수를 뭉치면 45%에 달했었다는 사실은 민 장군의 등장에 큰 뜻을 부여해 주고 있다. 그러나 민 장군이 티 우에 맞서 출마한다 하더라도 과연 반 티 우-키 표를 묶어 그를 지지하는 유효 표로까지 끌고 나갈 것인지는 미지수이다. <장두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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