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해방에서 환국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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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동경에 돌아온 영친왕비는 즉시 귀국준비에 착수했다. 서울에 사는 윤대비는 물론 박대통령으로부터도 영친왕을 왜 어서 모셔오지 않느냐고 재촉을 받았을 뿐더러 일반 민중도 이 가엾은 왕자의 귀국을 열망했으므로 비록 중병에 걸려서 말은 잘못한다고 하더라도 되도록 생전에 고국의 산천을 보게 함이었다
그래서 1963년10월7일 밤에는 동경 아까사까(적판)에 있는 뉴·저팬·호텔에서 영친왕비 주최의 작별 파티가 열렸는데 그 자리에는 배의환 주일한국대사와 일본정부를 대표하여 오오히라(대평) 외상을 비롯한 여러 각료와 영친왕의 귀국을 위하여 많은 애를 쓴 우사미(우사미) 궁내청장관과 기타 한일양국의 유지 1백여명이, 참석해서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그날 밤 오오히라 외상이 필자에게 넌지시 말한 바에 의하면 박대통령의 호의로 영친왕이 귀국하신다는 말을 듣고 이께다(지전) 수상은 부랴부랴 임시 각의를 소집하고 아무리 패전의 상처가 컸었다고 하더라도 그동안 일본정부가 영친왕께 대해서 너무나 소홀히 하였음을 미안스럽게 생각하여 우선 예비비에서 1천8백만원(미화 5만불)을 지출하여 전별금으로 드리기로 결정되었다고 하였다.
그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이 박대통령과 한국정부에서 영친왕께 대해서 최대의 편의를 제공하여 아무리 병중이라고 하더라도 기어이 본국으로 모시어 가겠다는 굳은 결의를 표명한데 크게 자극을 받고 한편으로는 무안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섭섭한 생각에서 그만한 돈이라도 제공해서 최소한도의 체면이나마 유지코자 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일본정부에서는 그 돈 중에서 2백만원은 영친왕이 침대에 누워서 타고 가실 비행기(일본항공)의 전세료로 주고 나머지는 수일 후 구씨에게 전달했다.
1963년11월22일- 이날은 영친왕이 50여년 만에 귀국하는 날이다. 당시의 심경을 방자부인은 이렇게 기록하였다.
다시는 재기할 날이 있을 것 같지 않은 바깥어른,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운수가 나쁜 오랜 세월이었습니다. 50여년 만에 겨우 맞이한 이 귀국의 날을 바깥어른께는 말씀조차 못하였는데 『의사나 간호부에게 부축되어서 귀국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씀하시던 때의 병세였다면…이라는 생각을 하면 더욱 안타까운 생각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만일 귀국하신다는 말씀을 하였다가 정신적인 동요가 일어나서 병환이 더 하시지나 않을까 하는 노파심으로 그렇게 한 것인데 설사 말씀을 여쭈었더라도 아무 것도 모르셨을지도 모릅니다.
관대하게 반가이 맞이해 주는 박대통령각하의 시대가 된 국운과 이런 중병에 걸린 주인의 운명과의 타이밍이 맞지 않아 병상에 누우신 채 귀국을 하게된 것은 참으로 슬프고 또 유감 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깥어른과 둘이서 이야기를 주고받지 못한 것도 벌써 몇 해가 되는지…전하의 병환을 걱정하면서 모든 것을 혼자서 걱정하고, 혼자서 처리해온 지금까지의 모양으로 귀국 후에도 혼자서 해나가야 할 것이며 한국인이기는 하지만 일본의 피를 타고난 나는 나대로의 마음 속에 간직한 부채를 조금씩 갚아 나가지 않으면 아니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한국 국민으로서 또는 사회의 한사람으로 살아가면서 한국사회가 조금이라도 밝게, 또 한 사람이라도 불행한 사람이 구제되도록 노력할 것을 나는 귀국을 앞두고 마음속으로 깊이 다짐하였습니다.
일본을 떠나오던 날
『전하, 자, 가시지요. 모시고 가겠습니다.』
『그런가, 이제는 정말 가는가?』 『참으로 오래고 또 오랜 여정이었습니다.』
『그것이 겨우 지금 끝이 난단 말이지.』
마음속으로 이렇게 문답을 한 후 나는 궁내청에서 보내준 앰블런스에 바깥어른을 모시고 하네다 공항에서 다시 특별기로 옮기는데, 공항에는 천황폐하의 칙사를 비롯하여 한일 양국의 많은 사람들이 전송을 나와 있었습니다.
『일본이여 잘 있거라, 오랫동안 신세를 많이 졌다.』
두번 다시 오지 않을 일본을 뒤로 두고 우리가 탄 특별기는 일로 서울로 향하여 날았습니다. 바깥어른은 여전히 침상에 누운 채 그저 천장만 쳐다보고 계셨고 나는 만감이 교차해서 혼자서 울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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