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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해방에서 환국까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민병기교수의 덕택으로 벼락감투를 쓰게된 우리들은 곧 일본으로 떠날 준비를 하게되었는데 악선재 윤 대비과 운현궁 흥친왕 비는 너무나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었다. 그 중에도 나와함께 「특사」가된 엄주명씨는 감격한 나머지 오직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그것도 그럴 수밖에, 엄주명씨는 엄 비의 친정조카로 영친왕에게는 외종 사촌이 될 뿐더러 1907년 영친왕이 일본으로 끌려갈 때에는 그도 함께 따라가서 고락을 같이하여 그때까지 살아있는 사람으로는 영친왕의 유일한 혈연이었으므로 그는 영친왕의 이야기만 나오면 언제나 눈물을 흘리고 가슴이 메여서 말을 못했던 것이다.
영친왕의 학우라는 명목으로10여살 때에 일본으로 건너간 엄주명씨는 고모가 되는 엄 비의 희망도 있고 하여 영친왕과 똑같은 길을 걷게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의 유년학교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육군대위까지 승진하였다가 그의 부친 엄준원씨가 교장으로 있던 진명 여고를 계승하기 위하여 자원해서 예비역으로 되었으며, 해방후에는 국군준장으로 많은 공적을 남겼는데, 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의 특사가 되었을 때에는 그도 건강이 좋지 못하여 병석에 있었다.
그렇건만 그는 밤낮으로 잊지 못하던 영친왕을 하루바삐(해방후 처음으로) 만나 뵈옵기 위해서 즉시 출발코자 하였으나 여권절차를 밟자면 상당한 시일이 걸리겠으므로 우선 여권을 가지고있는 나부터 먼저 떠나기로 하였었다.
그런데 필자는 전기한 바와 같이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특사」가되기는 했으나 정작 박 의장은 한번도 만나본 일이 없으므로 박 의장을 만나서 우선 고맙다는 인사라도 하는 것이 예의 상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당시 모신 문사 주필로 있던 김팔봉 선생을 찾아갔다. 팔봉 선생은 필자의 족숙이 될뿐더러 박 의장과는 개인적으로 잘 아는 사이라고 하므로 그 사유를 설명하고 면회의 알선을 요청하기 위함이었다.
나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팔봉 선생은 그것도 그럴 것이라고 하더니 즉시 최고회의 비서실로 전화를 거는 모양이었다. 저편은 최고회의의장 비서장인 듯 한참동안 말이 오락가락 하더니 결국 <의장 각하는 몹시 바쁘시니 구태여 만나 뵈올 것은 없고 그대로 가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나의 할 도리는 다 했다는 생각을 하고 그날로 동경으로 떠났던 것이다.
1961년 8월6일-그날은 일기가 몹시 더운 날이었다. 5·16군사혁명 후 처음으로 서울을 떠난 나는 그날 오후7시쯤 동경 하네따 공항에 도착하니 신문과 라디오로 박정희 최고회의의장의 특사가 온다는 것이 미리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공항에는 수많은 기자들이 미리 나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 중의 성급한 기자는『당신이 이번에 동경에 온 것은 박 의장의 특사로 이왕 전하를 모시러 온 것이 아니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에 대해서 나는 『그것은 나중 일이고 지금은 다만 입원중인, 왕 전하를 문명코자 온 것뿐이다』라고만 말한 후 즉시 자동차를 몰아서 쓰기지에 있는 성로가 병원으로 향하였다.
동경 성로가 병원은 서울의 성모병원과 같이 카톨릭에서 경영하는 동경에서도 가장 권위가 있는 병원으로 좀처럼 급히 입원하기가 어려온 곳이건만 한국대사관에서 교섭하여 특별히 가장 좋은 방으로 그것도 금세 입원을 하게 된 것임을 알았다.
병원에 도착하여 특등 병실에 들어서니 영친왕이 누워 계신 침대 옆에는 다만 방자 부인이 외로이 혼자 앉아있을 뿐인데 영친왕은 필자를 알아보시고 그러는지 약간 반가운 표정을 지으실 뿐, 아무 말씀도 못하였고, 방자 부인은 『수일 전에 갑자기 대사관 이동환공사의 김 비서라는 사람이 와서 박 의장의 명령이니 곧 입원을 하시라』고 하여 부랴부랴 입원을 하게된 경위를 말씀하는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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