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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해방에서 환국까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장면총리의 회한-.
영친왕 전하 옥안 하
천만몽외로 축하의 서한을 배승하오니 감패불망이오며 4·19혁명은 불의와 부정에 대한 민중의 분노와 항거가 마침내 혁명으로 결실된 것이 오며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각자가 명심해야 될 줄로 아옵나이다.
전하께서는 기울어져 가는 국운과 함께 일본으로 끌려가신 채 거의 반세기 동안을 일본에서 지내셨으니 이역만리에서 그 고달프심이 얼마나 심각하셨겠습니까?
그런데 해방후 벌써 15성상이 경과하였건만 전하께서는 아직도 일본에 계신 채 돌아오시지를 못하오니 이 어이된 일이 오니까.
과거의 일은 어쨌든 이제부터는 하루바삐 전하를 모셔오고자 하오니 전하께서도 지나간 날 본국정부에서 잘못한 것을 다 용서하시고 되도록 속히 환국하시와 신생 공화국을 위하여 지도와 편달을 해주신다면 이 위에 없는 행복으로 알겠나이다.
끝으로 전하와 비전하의 건강과 환국 하시는 일이 순조롭게 잘 진행되기를 기원하여 마지않나이다.
1960년10월
대한민국 국무총리 장 면 영친왕은 그 편지를 받고 장면총리의 온정을 고맙게 생각했으며 4·19혁명은 역시 <올 것이 왔다> 라는 느낌을 깊이 하였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장 총리는 또 주일공사를 통해서 「주영대사」로 나갈 생각은 없느냐고 물어왔으나 영친왕은 「건강상의 이유」를 들어 즉시 사퇴하였다. 건강이 그다지 좋지 않으셨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보다도 영친왕은『아무리 망향의 생각이 간절하다고 하더라도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우려가 있는 동안에는 돌아가지 않겠다. 모든 것이 안정되지 않은 지금은 아직 이르다』는 생각이든 때문이었다.
그것은 해방후·영친왕의 일관된 생각이었으니 미군정 때 있었던 국방경비대의 참모장, 대한민국 탄생후의 국방장관, 채병덕 참모장 시대의 항공사령관 등의 취임교섭을 모조리 거절한 것도 모두 똑같은 이유에서였다.
영친왕 자신의 생각은 처음부터 끝까지「통일된 조국」에 돌아와서 정당정파를 초월하여 오직 민중의 복리만을 위해서만 무엇이고 보답할 일이 있으면 그 일에 나머지 생애를 바치겠다는 생각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 이듬해 즉 1961년 이른 봄 서울에 돌아온 필자는 즉시 경무대로 윤보선대통령을 예방하고 그 길로 중앙청으로 가서 장면국무총리를 심방 하였다. 개인의 인사도 인사려니와 첫째영친왕의 환국 문제를 의논하기 위함이었는데 대통령이나 국무총리나 영친왕에 대해서는 다 같이 최대의 동정과 호의를 표시하였으며, 이대통령이 영친왕께 대해서는 너무나 냉담하게대한 반감도 있고 하여 4·19혁명의 혜택을 영친왕께도 나누어 드리려는 태도와 성의가 역력히 보였다.
그 중에도 한가지 걸작은 사표를 낸 오재경씨의 후임으로 구 황실 사무총 국장을 새로이 임명하는데 자천 타천의 후보자가 상당히 많았건만 장 총리는 일부러 이수길씨를 새로이 국장에 임명하였다는 사실이다.
이수길씨는 의친왕(1955년8월 서울에서 78세를 일기로 서거)의 수많은 자녀의 한 사람으로 고 이우 공의 동복형제인데 당시 장 총리의 생각으로는 <구 황실 사무총국이라는 것은 요컨대 구 황실과 영친왕의 재산을 관리하는 기관인데 역대 책임자가 협잡질만 해왔으니 기왕이면 친척 중에서 적임자를 임명하는 것이 오히려 낫지 않을까>하는 신념에서 특히 영친왕의 조카뻘이 되는 이수길씨를 임명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뜻밖에 구 황실 재산관리 사무총 국장에 취임한 이수길씨는 그해 3월에 영친왕께 그 사유를 보고하고 금후 환국 문제를 준비 차 동경으로 떠났는데 그때 처음으로 구 황실관리국 예산 중에서 일금 1백만 환을 갔다가 영친왕께 드렸으니 이것이 본국 정부로부터 영친왕이 받은 최초의 금액이었던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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