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지하철 참사] "실종 딸 대신 다른 학생 입학시키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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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 대신 다른 학생에게 빨리 서울대 합격의 기쁨을 전해주세요."

대구지하철 참사로 실종된 이현진(19.대구외국어고3)양의 아버지 이달식(47.대구시청 총무과 행정6급)씨는 지난 20일 서울대에 전화를 걸었다. 사회과학대에 합격한 현진양의 입학포기를 알리기 위해서다.

"등록금을 반환하지 않아도 좋으니 차점자에게 기회를 주세요." 딸의 시신을 확인하러 다니느라 경황이 없었지만, 누군지 모를 학생에게 합격소식을 전해주고 싶었다. 이씨는 지난 18일부터 부인 이숙자(45)씨와 딸의 유류품이라도 찾기 위해 사고현장 주변과 대구시내 병원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어디에도 현진이의 흔적은 없었다. 단념한 이씨는 오전에는 업무를 챙기고, 오후에는 사고대책본부와 분향소가 마련된 대구시민회관에서 '안내'완장을 차고 유족들을 위로하며 봉사활동 중이다.

조해녕 대구시장이 잠시 쉬라고 권했지만 "동료들이 비상근무하는 상황에서 슬픔에만 잠겨 있을 수 없다"고 대답했다.

"서울대생 부모라는 자부심으로 한 학기를 보낼까도 고민했어요. 그러나 누군가 현진이의 못다 이룬 꿈을 이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현진이의 꿈은 직업외교관이었다. 평소 "유엔본부나 산하기관에서 코리아의 위상을 높이고 싶다"는 포부를 밝혀왔다.

현진이는 고교시절 리더십이 강한 우등생이었다. 담임교사인 김돈호(33)씨는 "공부도 잘했지만 학생회 총무부장으로 열심히 일했다. 급우들을 이끄는 리더십이 강한 모범생이었다"고 말했다. 친구인 김다현(19)양도 "어머니가 없는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며 반찬도 챙겨주고, 틈만 나면 사회복지시설을 찾아 봉사활동을 했다"고 말했다. 24일 오전 합동분향소에서 현진이의 영정을 끌어안고 "어떻게 너를 보낸단 말이냐"며 통곡하던 어머니 이숙자씨는 안타까운 그날을 돌이켰다.

18일 아침 현진이는 평소처럼 음악학원에 간다며 집을 나섰다. 대학교에서 재즈동아리에 들어가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리고 오전 10시3분쯤. 전화벨이 울렸고 어머니 이씨가 수화기를 들자 "안돼, 엄마. 이러면 안돼"하는 비명만 남긴 채 끊겼다.

괴한에게 납치된 것으로 생각해 음악학원으로 달려갔지만 "아직 안왔다"고 했다. 거리에는 소방차 사이렌이 요란하게 울렸지만 그것이 딸과 관련이 있으리라곤 꿈에도 몰랐다. 현진이의 친구와 통화하고 나서야 오전 9시50분쯤 지하철 대구역에서 헤어진 것을 알았다. 현진이가 지하철에 오른 시각, 중앙로역의 1079호 전동차에는 불이 번지고 있었다.

후에 휴대전화 위치를 확인한 결과 발신지는 전동차 1080호였다. 전동차 문이 닫힌 채 불길이 거세게 옮겨붙고 있을 때, 현진이는 숨이 턱턱 막혀오는 상황에서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사고현장인 중앙로역 승강장 시커먼 벽에는 남동생 병탁(16.대구외국어고1)군이 쓴 대자보가 붙어있다. "내가 마지막으로 해 준 건 라면 한 그릇과 '갔다 와'라는 말 한마디 뿐이었어. 정말 미안해. 이승에서 10년이 저승에서 하루라고 하니까 누나 7일만 기다려."

아버지 이씨도 이날 현진이에게 편지를 썼다. '고교시절 공부에만 매달리다가 네 꿈을 펼치려는 순간이었는데.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네가 우리 곁에 없다는 사실이…보고 싶다. 제발 네 모습이라도 찾았으면…'.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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