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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연출가 데뷔 서현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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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현철(38). 그를 처음 본 건 3년 전 창작 뮤지컬 '황구도'에서였다. 똥개와 귀족견의 사랑을 이어주는 땡추스님 역이었는데 의뭉스러운 표정과 말투로 주인공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은 기억이 난다.

같은 해 가을, 연극 '약(藥)테러 락(樂)'에서 그를 또 봤다. 테러리스트가 세상 약을 모두 없애겠다며 약국에 테러를 자행한다는 내용인데 압권은 다름 아닌 막간극이었다.

장군 다섯명이 적군 3천명과 싸우는 상황을 기발하고 코믹하게 묘사하는 데서 그는 단연 돋보였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수루에 홀로 앉아/긴 칼 옆에 차고/시름하는 차에…"라는 이순신 장군의 한시를 패러디해 "간담이 서늘한 밤에/겁없이 홀로 앉아/긴 칼 걷어차고/꾸벅꾸벅 졸던 차에…"라고 심각하게 읊조릴 때 관객들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자지러졌다. 이 장면은 그의 반짝 아이디어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를 세번째 본 것은 연극 '인류 최초의 키스'에서다. 감호소 수인(囚人)들을 면접하는 심리학자 역을 어찌나 얄밉게 연기하던지 그간의 코믹한 모습들은 온 데 간 데 없었다.

그리고 지난 20일 오랜만에 그를 봤다. 이번엔 무대 위가 아닌 무대 뒤에서, 연극배우가 아닌 연출가로서다. 21일 막이 오른 연극 '지팡이를 잃어버린 채플린'은 서씨가 쓰고 연출을 한 첫 작품이다.

최종 리허설을 준비하느라 바쁜 그를 자리에 앉히자마자 터져나오는 소리, "휴-." 극 분석하랴, 배우들 연기 지도하랴, 무대 조명.음향 챙기랴 정신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작심했단다. "앞으로 연출에선 손떼야겠다"고.

'채플린'은 산부인과 병원.지하철 전동차 안.다리 위에서 벌어지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세가지 에피소드로 보여준다. "지팡이가 없는 채플린은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어요.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도 삶에서 뭔가 결여된 사람들이죠. 연극을 보면 채플린 영화처럼 웃으면서도 마음 한 구석이 애잔해질 겁니다." 그래서 이 극을 '눈물나게 웃기는 연극'이라고 명명했다.

이번 연극은 그의 '관찰 작업'의 산물이다. 그는 사람들을 관찰하길 즐긴다. 지하철 안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밥을 먹을 때도 주변을 놓치는 법이 없다. 그렇게 적어놓은 습작노트들은 작품의 영양분이 된다.

에피소드 사이에 그는 자신의 주특기인 막간극을 선보인다. 할아버지가 삶은 달걀을 먹으려고 한다. 어렵게 껍질을 벗기다 달걀이 날아가 버리자 소금을 손가락으로 찍어 먹으며 아쉬움을 달랜다. 아주 간단한 내용인데도 그 속엔 연민과 안타까움, 때론 웃음이 교차한다. "어떤 할아버지가 홍시를 먹으려고 하는데 알맹이가 쏙 빠져버린 거예요. 껍질만 훑는 걸 보노라니 참 안타깝더군요. 상황은 너무나도 우습지만 그 뒤편에는 노년의 고통과 쓸쓸함이 자리하지요. 전 그걸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평범한 회사원이던 그는 서른살에 연극판에 들어왔다. 봤던 연극이라곤 초등학교 때 어린이극인 '왕자와 거지' 정도였다.

하지만 막연히 연극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마침내 "지난 30년은 관행대로 살았다면 앞으로 30년은 하고 싶은 걸 해보자"며 인생 역전을 단행했다. 결과는? 스스로 "억세게 운이 좋은 배우"라고 겸손하게 말하지만, 연간 5~6편의 연극에 출연할 정도로 연출가들이 탐내는 배우다.

지난해부터는 교육 연극에도 맛을 들여 어린이들을 만나는 재미에 푹 빠져있는 그의 향후 관심사는 무얼까. 우문현답이 돌아왔다. "다시 배우로 무대에 서는 것"이란다. 3월30일까지 인켈아트홀, 02-765-1638.

글.사진=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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