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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 버리고 형제애 깨달은 흑인 지도자의 고백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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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9호 28면

사상 최고의 복서 중 한 명인 무하마드 알리는 이렇게 말했다. “확인이 거듭되면 믿음이 생기고 믿음이 신념이 되면 뜻한 바를 이룰 수 있다.” “인생은 한 번뿐인 데다 곧 사라진다. 남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한 일뿐이다.” 여기서 ‘하나님’은 이슬람의 하나님이다.(우리말 『꾸란』은 알라(Allah)를 ‘하나님’으로 번역했다.) 알리를 이슬람으로 인도한 것은 맬컴 엑스(1925~1965)다. 엑스는 하루에 한 끼만 먹고, 새벽 5시에 일어나 기도하고 약속에 절대 늦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다.

힐링 시대 마음의 고전 ⑮ 맬컴 엑스의 『자서전』

엑스는 마틴 루서 킹 목사(1929~68)와 더불어 20세기 미국의 양대 흑인 지도자였다. 둘의 방법론은 대조적이었다. 킹 목사는 흑백 통합을, 엑스는 암살되기 1년 전까지는 흑백 분리를 주장했다. 미국에 흑인국가를 세우려고 했다. 엑스는 백인에 대한 증오도 숨기지 않았다. 필요하면 방어적 폭력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피부가 다수 흑인보다 희었던 그는 자신의 몸에 흐르는 ‘백인 강간범의 피’를 혐오했다. 시사주간지 타임이 1998년 ‘가장 영향력 있는 20세기 논픽션 톱10’으로 선정한 엑스의 『자서전』(1965)은 그가 증오를 버리고 형제애를 지향하게 된 행적의 기록이다.(1978년 창작과비평에서 나온 우리말 『자서전』은 절판됐다.)

맬컴 엑스의 『자서전』영문판(펭귄 모던 클래식·Penguin Modern Classics) 표지.

“미국에서 흑인은 감옥에서 태어나는 것”
엑스는 63년 한 인터뷰에서 “미국에서 흑인으로 태어나는 것은 감옥에서 태어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엑스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다. 백인우월주의자들의 소행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아버지가 사망한 후 한 남자를 사귀다 버림받은 어머니는 정신병원에 수용됐다. 위탁 가정에서 자라난 엑스는 한때 학교 성적이 우수한 모범생이었다. 반장으로 뽑히기도 했다. 선생님에게 “변호사가 되고 싶다”고 장래 희망을 밝혔더니 선생님은 “너는 흑인이라 가망성이 없다”며 목수 일을 권했다. 소망이 꺾인 엑스는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뉴욕 할렘에서 마약거래, 매매춘 알선, 강도질의 늪에 빠져 살았다. 방황 끝에 엑스는 결국 10년형을 선고받고 46년 감옥에 가게 된다.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은 ‘이슬람 국가운동(Nation of Islam)’이라는 미국에서 생긴 이슬람 종파였다. 52년 신자가 됐다. 이 종파는 천국이나 지옥은 없다는 등 정통파 이슬람과 다른 교리를 주장했다. 또한 백인우월주의에 대항해 흑인우월주의로 맞불을 놨다. 52년 가석방 후 64년까지 ‘이슬람 국가운동’의 목회자·대변인으로 활동한 엑스도 ‘백인은 눈이 파란 악마’라며 “백인은 세상에 대혼란을 가져오기 위해 창조된 악마”라고 주장했다. 적(敵)의 적은 친구였다. 엑스는 공산주의자를 자처했다.

암살 1년 전 맬컴 엑스의 모습.

엑스의 활약으로 수백 명에 불과하던 신자가 수만 명이 됐다. 엑스의 가공할 파괴력은 지식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엑스는 감옥에서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통신 과정으로 영문법과 라틴어를 공부했다. 사전을 A부터 Z까지 통독했는데 아예 통째로 외울까 하는 생각도 했다. 단어에 강했다. 폭포수가 쏟아지듯 백인에 대한 증오를 화려한 언변으로 분출하며 지지자들의 마음을 후련하게 했다. 이런 말로 말이다. “권력 앞에서 웃는다고 권력이 물러서지 않는다. 비폭력적인 사랑은 권력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 권력은 속성상 더 큰 권력 앞에서만 물러선다.”

로버트 그린이라는 작가가 쓴 『권력의 법칙(48 Laws of Power)』에서 제1법칙은 ‘네 두목보다 더 밝게 빛나지 말라(Never outshine your master)’다. 보스의 질투심과 불안감을 막기 위해서다. “영혼은 사랑을 낳고 권력은 불안을 낳는다”는 말을 남긴 엑스지만 그는 이 제1법칙을 깼다. 종파의 우두머리인 일라이저 무하마드보다 유명해졌다. 일부러 깬 것은 아니었다. 엑스는 모든 말을 ‘일라이저 무하마드의 말씀에 따르면’으로 시작했다. 항상 낮은 자세를 취했다. 언론 매체는 엑스를 사랑했다. 흑백 문제가 생기면 우선 그를 찾았다. 기자들에게 그는 풍성한 제목거리를 제공했다. 세상이 보기에 ‘이슬람 국가운동’의 지도자는 일라이저 무하마드가 아니라 엑스였다. 엑스의 반대파가 두 사람의 갈등을 부추겼다.

64년 일라이저 무하마드와 결국 갈라선 엑스는 사우디아라비아 메카로 성지순례를 떠났다. 흑백 갈등은 미국 내 상황일 뿐, 보편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피부색과 상관없이 온 인류가 형제애를 나누는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엑스는 수니파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이름도 ‘엘 하지 말릭 엘 샤바즈’로 바꿨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땅에 태어난 지 39년 만에 성스러운 도시 메카에서 만물의 창조주 앞에 처음 서게 됐고 내가 완전한 인간이라고 느끼게 됐다.” 엑스는 또한 “무슬림이라면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많이 해 지금 후회한다”고 했다. 64년 4월에는 킹 목사와도 만나 연대를 모색했다. 활동 무대도 미국에서 전 세계로 넓힐 참이었다.

메카서 인류애 목격, 수니파 이슬람 개종
65년 2월 뉴욕 맨해튼에서 개최된 집회에서 엑스는 ‘이슬람 국가운동’이 보낸 사람들에 의해 암살당했다.

60년대 말 『자서전』을 소지한 학생은 퇴학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사후 미국은 분열과 분리가 아니라 통합과 일치의 길을 걸었다. 반국가단체로 치부된 ‘이슬람 국가운동’의 지도자였으며 흑인의 총궐기를 선동하던 엑스는 미국 현대사의 ‘자랑스러운’ 일부가 됐다. 그의 이름을 딴 대학이 생기고 거리가 생겼다. 그를 기리는 미국 우표도 나왔다. 특히 92년엔 『자서전』을 바탕으로 만든 3시간21분 분량의 영화 ‘맬컴 엑스’(덴절 워싱턴 주연)가 개봉되자 맬컴 엑스 열풍이 불어 미국에 1억 달러 규모의 시장이 형성될 정도였다. 할렘가의 흑인 청소년부터 빌 클린턴 대통령까지 엑스(X) 마크가 선명한 야구모자를 쓰고 티셔츠를 입었다. 『자서전』도 ‘미친 듯이’ 팔려나갔다.

흑인 테니스 스타 세레나 윌리엄스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무하마드 알리를 사랑하며 그의 원칙과 동일한 가치로 살아간다.” 세레나를 바꾼 것은 알리, 알리를 바꾼 것은 엑스였다. 오늘도 많은 사람의 삶이 엑스로 말미암아 바뀌고 있다. 증오가 형제애로 바뀌는 현장에 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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