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김을한|해남에서 환국까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고종황제가 그 옛날 해아(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고 그후 파리강화회의 때에도 밀사를 보내려다가 비명횡사를 한 것은 역사상 유명한 이야기거니와 해아 밀사사건 당시에는 그래도 이상설, 이준, 이위종씨와 같은 인물이 있었으나 파리강화 회의 때에는 밀사를 보내는데 필요한 비용도 문제였지만 그 보다도 더욱 큰 문제는 밀사로 보낼만한 인물이 없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고종은 시종 김황진을 볼 때마다
『얘, 누구 사람이 없느냐?』고 물었고『지금부터라도 인재 양성의 필요가 있으니 장래가 유망한 청년이 있거든 해외에 유학이라도 시키라』고 항상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 아버님의 피가 흘러서 그랬던지 영친왕도 제2세 국민의 교육과 인재양성에 대해서는 남 유달리 특별한 관심이 있었으니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벌써 이왕직 장관에게 명령하여 당신은「이화회」를, 방자비 앞으로는 홍희료라는 장학회를 만들어서 영재교육에 힘쓴 것은 그 한 좋은 예라 할 것이다.
그런데 6·25동란 당시 정부가 부산에 있을 때 일본에는 한국으로부터 밀항해 온 사람이 상당히 많았는데 그 중에는 전란을 피하여 일본으로 와서 한목 잡아 보겠다는 장사꾼들도 많았으나, 그 보다도 서울에 있는 학교 (대학)에는 가려야 갈 수가 없고, 부산에는 수백만 피난민만 들끓을 뿐 공부를 할 수가 없으므로 우선 가까운 일본으로라도 가서 학교엘 가보겠다는 학생들이 더 많았었다. 그리하여 3t이나 5t짜리의 조그만 배를 타고 현해탄을 건너다가 비명횡사를 한 학생도 적지 않았으며 구사일생으로 일본에 상륙은 했으나 말도 모르고, 김도 몰라서 곧 일본경찰에 체포되는 사람도 많았었다.
1951년 1·4후 퇴직 후 정부가 임시수도 부산에 있을 때 일본「오오무라」(대촌) 수용소에는 밀항으로 일본에 잠입했다가 수용된 남녀 한국인이 1천여 명에 달하였고 그 중에는 공부하러 온 학생이 5, 6백 명이나 되었다.
영친왕은 만일 부산마저 함락되었을 경우, 거기에 있는 중요한 인물과 군대를 피란 시키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그것은 원체 거창한 일이므로 장래 운명에 맡길 수밖에 없으나 당장 일본에 밀항해 왔다가 체포 구금된 학생을 석방 시켜서 학교에 가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급선무라고 생각하고 당시 일본 최초의 출입국 관리청 장관이던「스스끼」(영목일)씨에게 그 점을 역설하여 선처를 요망하였다.
「스스끼」씨는 일본의 패전당시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함으로써 일본의 멸망을 면하게 한「스스끼」(관대랑) 수상의 아들로, 인격과 식견이 높은 양심적 인물이었다. 그는 본시 농림성 관리인데 그의 부친이 총리대신이 되어 언제 어느 때 철저한 항전을 부르짖는 청년 장교들로부터 암살을 당할지 모르게 되자 흔연히 산림국장이라는 중요한 벼슬자리를 버리고 자진해서 몸소 노부의 보디·가드가 되었고, 해방 후에는 한때 천황의 시종차장이 된 일이 있었던 만큼 영친왕에 대해서도 항상 깊은 이해와 동정심을 품고 있는 사람이었다.
영친왕의 높은 뜻이 주효하였던지 어느 날 영목장관은 출입국 관리청에서 긴급 간부회의를 열고 다음과 같은 훈시를 하였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지금 한국은 전란으로 수많은 학생들이 재대로 공부를 할 수가 없으므로 일본으로 밀항을 해와서 현재 대촌 수용소에 수용된 학생만도 6백여 명이나 됩니다. 밀항을 했다는 그 자체는 나쁘지만 젊은이들이 학교에 아니겠다는 그 열의만은 이해해 주어야 될 줄 압니다. 따라서 나는 무슨 편법이라도 강구해서 그들 학생이 최소한도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만이라도 일본에 체류할 수 있도록 가방면을 해주려고 하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오.』
그리하여 영목씨는 제일교포의 한 사람인 김판암, 권일두 변호사를 보증인으로 삼아서 그들 밀항 학생을 전부 석방하여 잠정적이나마 일본에서 공부를 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 반면 주일 대표부의 김용주 공사는 경무대로부터 밀항자는「범법자」이니 즉시 본국으로 잡아 보내라는 훈령이 성화같았으나 일본정부의 관리인 영목 장관도 그같이「휴머니즘」을 발휘하거늘 어찌 한국인으로서 냉혹 무쌍한 조처를 취할까 보냐? 라는 생각에서 최문경, 신철선, 한재상 등의 서기관들로 하여금 은근히 밀항 학생들을 구제하는데 협력토록 하였었다.
영목 장관으로부터 그 보고를 받고 평생 처음이라고도 할만큼 얼굴이 활짝 피어서 나의 일처럼 기뻐하시던 그때의 영친왕의 인자한 표정을 나는 지금 까지도 잊을 수가 없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