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천대|윤세원<경희대 공대 학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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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해마다 방학이 되면 해묵은 일을 정리하겠다고 서두르지만 이런 일 저런 일 하찮은 잡일에 쫓기다 보면 계획되었던 일은 하나도 안된 채 방학은 다 지나가고 만다. 한번도 보람있는 방학을 지내보지 못한 것이 한이다. 올해는 처음부터 푹 쉬고 놀고 즐기겠다는 자의 반과 친구의 권고가 합친 타의 반으로 서해의 해수욕장엘 가족과 함께 가기로 했다.
아침 일찍 인천부두에 도착하여 하오 2시에 떠나는 배표를 사들고 땡볕아래서 3시간동안이나 기다렸는데 「바캉스」를 즐기려는 많은 인파로 배는 나와 나의 가족 그리고 많은 손님을 부두에 남겨둔 채 떠나버리고 만 것이다. 이 통에 아우성은 이루 말할 수 없고 부부가 생이별하는 광경, 짐짝만 싣고 타지 못하여 발을 동동 구르는 젊은 아가씨의 눈물 글썽한 모습…나도 모처럼 나온 「바캉스」기분이 순식간에 달아나고 말았다.
홧김에 사무실로 찾아가서 사무원에게 어째서 사람을 태우지 않고 배를 떠나보내느냐고 항의하였더니 아마 선장생각에 인원이 너무 많이 타서 위험하므로 손님을 못다 싣고 떠났나보다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러면 어째서 배표를 많이 팔았느냐고 재차 강경하게 항의하였더니 그사람 대답이 내일와서 배를 타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아마도 이런 일은 오늘 하루만 생기는 일이 아니고 늘 있는 일이어서 사무원도 손님들의 항의엔 면역되다시피 무감각한 표정이 아니겠는가. 당장은 분하고 울적한 일이나 이것이 우리나라 사정이고 보면 누구를 탓할 수 없는 체념 비슷한 생각이 들어 서글픈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외국에서는 기차나 「버스」, 배를 타고 내릴 때마다 차장이나 운전사가 부녀자의 손을 붙잡고 인도하면서 「워치·유어·스텝」(발 조심하세요)하며 친절히 인도함을 볼 수 있다.
공휴일이나 「러시 아워」에는 차를 더 많이 하여 손님들을 안전하고도 안락하게 실어 나른다. 이런 말을 하면 어떤 사람은 그들의 생활수준이 높아서 그렇다고 하겠지만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존중성이 깃들여 있는 것임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관이나 민간에서 경영하는 모든 교통수단이 사람을 마치 짐짝처럼 취급하고, 좌석수의 한도에서가 아니라 적재량의 한도에서 사람을 태우고 그것도 안되면 오늘 못 가면 내일 가면 되지 않느냐는 생각이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있는데 이것이 비단 이 나라의 가난 때문에서인가 그렇지 않으면 인간 천대사상에서 유연한 것인가.
자고로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지 않느냐라는 생각이 우리나라 사람에게 있어서의 습성이라 교통의 안전·정확·신속은 생각지 않는 것이 버릇이 되고 있지만 하루라도 교통수단을 이용치 않고는 활동할 수 없는 오늘의 생활에서 도시나 농촌이나 도서를 막론하고 인간을 화물과 동등하게 취급하는 생각은 하루바삐 버려야 하겠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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