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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해방에서 환국 까지|김을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그보다 먼저 영친왕이 제1항공 군사령관에 취임하자마자 서울로부터 윤홍섭씨가 왔다.
윤씨는 순종 왕비 윤 대비 마마의 친정 조카로 일찌기 미국 유학을 하였으며 설산 장덕수씨와의 친분 관계 때문에 이승만 박사의 동지회와도 깊은 인연을 가졌던 사람이다. 따라서 그는 구 왕실 관계자 중에서는 최고의 신 지식인이었으며 또 유일한 민족 운동가였다. 그러므로 대비 마마의 신임도 두터워 그때 동경에 오게 된 것도 실상인즉 대비 마마의 분부로 영친왕께 문안을 드리러 온 것이었다.
당시 동경의 영친왕 저에는 대문 앞에 헌병과 경관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외인의 출입을 일체 금하고 조선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면회를 못하게 하였으나 윤홍섭씨 만은 윤 대비의 조카라는 점에서 그저 돌려보낼 수가 없었던지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리하여 윤씨는 사무관의 안내로 응접실에서 이미 기다리고 있던 영친왕께 배알하였는데 사무관의 발자취 소리가 멀리 사라지자 윤씨는 정색을 하고 「전하! 왜 아직도 소개를 아니하시고 동경에만 계시옵니까. 대비 마마께서는 너무 심려를 하시와 밤에 잠도 잘못 주무십니다』라고 항변하듯이 말씀하니 영친왕은
군인이라는 것은 함부로 지방으로 못 가는 거요.』라고 대답하신다. 윤씨는 다시
『전하! 전하께서는 외부 사람과 만나지를 않으시니까 세계 정세를 잘 모르시는 듯 합니다. 「처칠」, 「루스벨트」, 장개석, 「스탈린」등의 카이로 선언에는 「적당한 시기에 조선은 독립이 될 것이다」라고 쓰여 있다는데 그것은 벌써 알고 계시겠지요.』
『……….』
『일본의 패전은 이미 기정 사실입니다. 동경의 공습 상태를 보셔도 잘 아시겠지요 만….』
『……….』
『「오끼나와」 (유구) 가 함락되면 일본의 명맥은 그만 이라고 지금 조선에서는 인심이 자못 소란합니다. 소의 내선 일체, 황도 선양 따위는 일부 친일 분자들의 잠꼬대요, 미군이 상륙하면 모두 마중을 나간다고 지금부터 서두르고 있는 중입니다.』 여기까지 말한 윤씨는
「구 왕실의 종친뿐만 아니라 뜻있는 일반 민중들은 전하께서 하루바삐 일본의 황족이 아니라 조선의 황태자라는 것을 분명히 하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신다면 조선이 독립되었을 때 전하께서 서실 땅이 없을 것입니다. 창덕궁 대비 마마가 제일 걱정하시는 것도 그 점입니다.』
영친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마음속에는 격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전하! 그렇지만 어쨌든 소인은 기쁩니다. 태황제 폐하의 높으신 분이 이제야 실현을 보게 되었으니까요. 가증한 총독부 놈들을 철저하게 응징할 날도 이제는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공습은 이제부터가 본격적이라는데 하루라도 빨리 서울로 돌아와 주십시오. 눈앞의 일만 보지 말고 장차 올 날을 잘 생각 하시와 영단을 내리시기를 다시 한번 복원하옵니다…. 그렇게 하시는 것만이 구 왕실을 위해서도 좋지 않을까 생각되옵니다….』
윤홍섭씨가 나간 뒤에 영친왕의 얼굴에는 두 줄기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그와 동시에 『나는 왕이 아니다. 인간이다. 인간이면 족하다.』 라는 생각이 불현듯 일어났다. 바로 그때에 방자 부인이 들어와서
『대비 마마께서 편치 않기라도 하신 가요?』라고 묻는다.
『아니, 그렇지는 않으신 모양이오.』
시국이 시국이므로 방자 부인도 더 이상 묻지를 않고
『공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집에도 방공호를 파 두어야지요.』라고 말씀하니 『방공호도 좋지만 「나스」로 소개를 하는 것이 어떨까?』
『그러면 전하는 어떻게 하시고요.』
『나는 여기 남지.』
「그렇지만 만일의 일이 있으면….』
『군격에 있는 몸이 마음대로 도피 할 수는 없으니까.』
『떨어져 있는 것은 싫어요. 만일 무슨 일이 있으면 나도 함께 죽고 싶으니까요.』
방자 비가 이렇게 말씀하니 영친왕은
『좋소. 죽게 되면 전보를 칠 터이니까 즉시 달려와서 같이 죽읍시다 그려!』라고 농담을 하시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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